<5> 연암과 나라사랑 동아리
연암, 박제가 ‘북학의’ 서문에 당시 사대부의 무사안일 질타
홍대용·정철조·이서구 등과 어울리며 앞선 신학문 배워
‘열하일기’가 패관문학?
‘패관(稗官)’이라는 용어는 2000년 전에 중국인 반고가 펴낸 ‘한서(漢書)’라는 역사책에서 비롯된다. ‘패’는 볏과에 속하는 알갱이가 작은 피를 말한다. 따라서 패관은 ‘작은 일을 하는 벼슬아치’다. 그들은 서민사회의 민담·전설·우스갯소리 등 자질구레한 이야기들을 수집했는데, 이를 ‘패관잡서’ 혹은 ‘패관소설’이라고 한다.
18세기 청나라에는 서구문명과 만인평등사상이 유입되고 상공업이 발달했으며 서민의식이 성숙했다. 동시에 고리타분한 동양고전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형식을 지향하는 패관잡서에 대한 수요도 크게 늘었다. 이러한 현상이 경제와 문화가 점차 발달하고, 중국과 빈번히 교류하던 조선으로 파급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같은 대중적인 추세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 인물이 있다. 바로 조선 사회의 개혁을 도모했다고 평가받는 임금 정조다. 그는 패관잡서의 수입과 유통을 막고, 이런 유(類)의 저술활동도 금지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비록 그의 할아버지(영조)처럼 범법자의 목을 잘라 거리에 내거는 잔혹한 탄압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개혁군주답지 않은 조치였다.
정조의 눈에는 ‘열하일기’가 패관잡서의 전형으로 비쳤다고 한다. 위선적인 유학자가 과부와 내통하다가 호랑이에게 된통 꾸지람을 듣는 ‘호질’, 사회적으로 천시되던 상업의 중요성을 일깨우고 시야를 세계로 돌릴 것을 주문하는 ‘허생전’과 같은 한문소설이 실렸으니 그랬을 것이다.
자유분방한 문체로 사대부 계층의 위선적이고 무사안일한 사고방식을 질타하고, 사회혁신의 열정이 짙게 풍기는 ‘열하일기’는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애국적인 ‘정치사상서’였다. 그 때문에 정조와 시대착오적인 양반들에게는 눈엣가시였지만, 연암의 주변에는 같은 생각을 하는 동지들이 있었다.
박학다식하고 견문 넓은 벗들
연암의 아들은 아버지가 사귀는 벗이 많지 않았고 “오직 홍대용·정철조·이서구와 수시로 왕래했으며,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이 배우며 따랐다”고 회고했다. ‘열하일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에 관한 정보(홍대용은 이미 소개)가 필요하다.
연암보다 일곱 살 위인 정철조는 44세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그는 도르래·맷돌·수차를 손수 제작하고, 지리학·천문학 등 서양문물에도 조예가 깊었다. 미술 감각도 뛰어나 정조의 초상화를 그릴 정도였다.
이서구는 20세에 문과에 급제해서 우의정까지 올랐다. 동아리 중에서 나이는 제일 어렸지만, 가장 높은 벼슬을 했으며, 침착하고 조용한 성품에 도량이 넓어서 연암이 매우 아꼈다고 한다.
이덕무·박제가·유득공은 모두 서얼 출신이었는데, 하나같이 박학다식하고 견문이 넓었으며, 연암을 깍듯이 섬겼다고 한다. 이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유득공의 작은아버지인 유금의 노력 덕분이다.
본명은 유련인데, 해금 연주에 뛰어나서 이름을 유금(琴)으로 바꾼 인물이다. 기하학에도 조예가 깊어서 호를 ‘기하(幾何)’로 짓고, 서재 이름도 ‘기하실’이라고 했다. 연암은 ‘열하일기’에서 서양의 기하학을 언급했는데, 홍대용과 유금에게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유금은 정조가 즉위하던 1776년에 중국을 방문할 때 이덕무·유득공·박제가·이서구의 시를 각 100편씩 총 400편을 정리해서 갖고 갔다. 그리고 당시 청나라의 대표적 문인 이조원과 반정균에게서 서문과 비평을 받아 함께 책으로 펴냄으로써 네 사람의 이름을 중국 문단에 소개했다.
서얼 출신인 유금은 조선에서 벼슬을 못 했지만, 중국에 가서는 당대 일류 문인들과 교류했을 만큼 외교적으로 비상한 인물이었다. 홍대용과 유금의 선구적인 인적 교류는 박제가·이덕무·박지원·유득공 등에게로 이어졌다.
연암의 ‘북학의’ 서문
중국인에게까지 이름이 알려진 이덕무와 박제가는 연암보다 2년 먼저 중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덕무의 연행록인 ‘입연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1778년 4월 13일(양력). 나와 박제가는 그토록 바라던 중국 여행을 하게 됐다. 천하를 유람하는 것은 남자로서 뜻있는 일인데, 더구나 친구와 만 리 길을 함께 가다니 얼마나 정겨운가? 떠나기 전날 밤, 나의 집에서 박지원·이서구 등과 작별의 대화를 나누다가 새벽닭이 울 무렵에 헤어졌다.
아침 식사 후 말 타고 홍제원으로 가서 동쪽 언덕의 금잔디 위에 앉았더니, 박지원·유금·유득공 등 여럿이 술을 갖고 왔다. 오후 4시경에 모두 손잡고 말을 맺지 못한 채 석별의 정을 나눴다. 서글픈 마음에 차마 떠나지 못하다가 뿌리치듯 말 위에 올랐다.”
한편 박제가는 중국 방문 후 체험담을 ‘북학의’로 엮어서 1780년 말 연암이 중국에 갔다가 귀국하자마자 서문을 부탁했다. 진정한 나라사랑이 무엇인지를 엿볼 수 있는 그 머리글의 일부를 소개한다.
“학문의 길에는 방법이 따로 없다. 모르는 것은 길 가는 사람이라도 붙잡아 묻고, 심지어 나보다 글자 하나라도 많이 안다면 어린 종 녀석에게라도 배워야 한다. 지구의 한 모퉁이에 태어난 우리 선비들은 편협한 기질을 가졌다. 발로 대륙을 못 밟아봤고, 눈으로 중국 사람을 보지 못했으며, 한 번도 제 강토를 떠나본 적이 없다.
그러니 우물 안 개구리나 밭의 두더지처럼 자기 사는 곳이 제일인 양 여기며 살아왔다. 법이 훌륭하고 제도가 아름다우면 오랑캐에게라도 배워야 하거늘, 단지 머리 깎지 않고 상투 틀었다고 스스로 천하에 제일이라며 지금의 중국은 옛날의 중국이 아니란다.
박제가는 중국에 가서 눈으로 헤아리고 마음으로 비교하지 않은 것이 없다. 눈으로 보지 못한 것은 필히 물어보았고, 마음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반드시 배웠다. 책을 펼쳐 보니, 내가 중국에서 보고 느낀 것과 같아 마치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것 같구나.”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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