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열하일기로 배우는 나라사랑

"머리 아닌 가슴으로 일하라"

입력 2016. 01. 14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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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국부론’과 ‘열하일기’


연암, 양반 지배층 향한 절규 성토

 

조선의 국부론 '열하일기'

1783년, 청 방문 3년 만에 나와

1901년에야 활자로 인쇄

청나라 모습 알린 여행기

국왕 정조와 사대부는 외면해

 

 


 

 

 

 

 


'열하일기'는 1780년 청나라 건륭제의 생일을 맞아 조선이 보낸 축하 사절단의 비공식수행원 연암 박지원이 집필한 기행문이다. 조선은 중국에 매년 몇 차례씩 사절단을 파견했으며, 그들이 남긴 방문록이 수백 건이 넘는다. 그런데 연암 일행은 당초 예정에 없던 '열하'라는 곳을 처음 방문했고, 연암은 '열하'라는 지명이 붙은 책을 최초로 펴냈다.



'열하일기'는 제목만으로도 파격적이다. 그간 조선 선비들이 남긴 '연행일기', '연행록' 등과 같이 연경(베이징)을 연상시키는 제목과 차별화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책에서 연암은 열하로 가는 힘든 여정은 물론 그곳에서 경험한 일들을 상세히 소개했다.



뜨거운 강이라는 뜻의 '열하'는 베이징의 동북쪽으로 230km쯤 떨어져 있으며, 청나라 전성기인 18세기에 더위를 피해서 황제가 임시로 머무는 별궁이 지어진 곳이다. 이 때문에 여름이 되면 이곳은 동서양 외교 사절단이 줄지어 방문하는 정치중심지로 바뀌었다.



현재는 청더(承德)의 행정중심지이며, 청나라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관광지의 하나다.

 



조선과 영국의 열하 방문 기록



1793년에는 영국 사절단도 건륭제의 생일을 맞아 열하를 방문해 국왕 조지 3세의 친서를 전달하고, 무역 확대와 외교공관 개설을 제안했다. 시기적으로 13년 간격을 두고 벌어진 조선과 영국 사절단의 방문은 '열하일기'와 영국의 기록을 통해서 청나라의 모습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차이가 있다면 '열하일기'는 국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읽히다가 100년이 훨씬 지나서야 진가가 드러났지만, 영국 사절단의 기록은 즉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는 사실이다. 영국에서는 세 권짜리 공식 자료집 이외에도 사절단의 부대표와 수행원의 책이 각각 발간됐으며, 외국어로도 번역됐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동행했던 청년 화가의 청나라 풍물 화보 발간이다. 그는 매우 사실적인 화보를 펴내서 성공하자, 또 하나의 화보를 발간했다. 본 연재물은 영국 사절단의 삽화와 기록도 적극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조선 사절단에도 화가가 포함됐을 텐데, 애석하게 현재까지 발견된 그림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부할 수 있다. 고화질 카메라에 버금가는 눈, 고성능 녹음기 못지않은 귀를 가진 연암 박지원이 영국 사절단의 모든 기록이나 그림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기록을 남겼다고!



'열하일기'의 시대적 배경



1780년 9월 8일(이하 모두 양력).
연암은 이날 열하에서 중국인과 대화 중에 담배가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왔다고 말한다. 그러자 중국인은 담배가 서양의 아메리카(본문에는 한자로 '아미리사아'로 표기)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중국인이 'America'의 'ca'를 '사아'로 읽은 것이 재미있다. 아무튼, 연암은 이를 '열하일기'에 그대로 기록했다.



'열하일기'에는 아메리카에 관한 더 이상의 언급은 없다. 그러나 연암은 아메리카라는 이름을 우리나라에 알린 최초의 인물이 아닐까 한다.



묘하게도 이들의 대화가 이뤄지기 4년 전인 1776년 7월 4일 북아메리카의 미국이 독립선언을 했다. 그리고 미국인들은 생명, 자유, 행복을 위해서 영국과 7년간의 전쟁 끝에 1783년에 독립을 쟁취했다.



1만 명이 조금 넘는 오합지졸의 식민지 군을 지휘하여 영국군을 굴복시킨 인물은 조지 워싱턴이다. 1789년 초대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워싱턴은 재선되어 총 8년 동안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어느 국왕 못지않은 특권을 누렸다. 그러나 1797년 주변의 유혹을 물리치고 권좌에서 스스로 내려왔다.



이후 미국은 북아메리카에서 영토를 계속 확장해서 1848년에는 거의 오늘의 영토로 확장했으며, 그로부터 100년 후에는 세계의 중심국가로 부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미국이 독립을 선언하기 70일 전인 1776년 4월 27일.



24세의 정조가 조선의 국왕이 되었다. 할아버지인 영조가 무려 52년이나 왕좌를 지키다가 82세로 세상을 떠난 지 6일 만이다. 근래에 세종대왕에 버금가는 훌륭한 임금으로 재조명받는 그가 즉위할 때, 청나라의 지배자는 65세의 건륭제였다. 정조처럼 24세에 제왕이 된 건륭제는 1735년부터 벌써 41년째 중국을 통치하고 있었다.



'국부론'과 '열하일기'



1776년은 영국에서 '국부론'이 발간된 해이기도 하다.
자유방임주의 경제정책을 주창한 불후의 고전인 이 책에서 애덤 스미스는 중국의 보호무역정책을 비판했다. 사실 그는 단 한 번도 중국을 방문해본 적이 없다. 그가 인용한 중국에 관한 정보는 13세기에 원나라에 체류했던 마르코 폴로의 기록과 출처가 불분명한 소문들이니 신뢰할 만한 내용이 별로 없다.



미국의 독립으로 북아메리카에서 이권을 상실한 영국은 앞서 언급했듯이 대규모 사절단을 청나라에 파견했다. 사절단의 무리한 시장개방 요구에 건륭제가 단호히 대처하자, 영국은 반세기 후 아편 장사를 시작해서 청나라를 파멸에 이르게 했다.



조선의 '국부론'이라고 할 수 있는 '열하일기'는 1783년 세상에 첫 모습을 드러냈다. 청나라 방문 3년 후에 연암이 손수 붓으로 쓴 것이다. 떠도는 소문에는 책이 나오자마자 선풍이 일었다고 한다. 그러나 무려 118년 동안이나 손으로 베껴서 읽히다가 1901년에야 처음 활자로 인쇄됐는데, 20세기 이전에 과연 얼마나 읽혔겠는가?



국왕 정조와 사대부들은 순수한 옛 문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이 책을 외면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왕조를 뒤흔들 만한 내용이 문제였을 것이다.



'열하일기'에는 머리와 입으로만 일하는 국왕과 사대부들을 향해 국민을 위해서 가슴과 손과 발로도 일하라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겼다. 이는 연암의 절규이자 시대적 조류였으나, 그들은 귀를 닫고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고 있었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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