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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운동부터? 1896년 이미 태극기로 불렸다

입력 2014. 05. 18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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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태극기’ 명칭 최초 사용 시기는



 

 

   우리 국기가 태극기로 불리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태극기에 관한 이런 근원적인 질문에 대해서 요즈음 근거 혹은 출처가 모호한 정보들이 인터넷을 통해서 어린이는 물론 성인들에게까지 널리 유포되고 있다.

 

 

  우선 책과 언론에 나타난 두 가지 사례를 보기로 하자. 
  ˝우리나라 국기를 ‘태극기’라고 부르게 된 건 바로 3ㆍ1운동 때부터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만세를 부르며 전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을 알린 3ㆍ1운동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3월 1일 정오에 일제히 ‘조선 국기’를 들고 나오기로 약속했습니다.” (<역사 속의 태극기>, 대교출판, 1999년)

 “3ㆍ1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37년 동안은 태극기가 아닌 ‘조선국기’로 불렸다. 그러다가 3ㆍ1운동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33인의 민족대표들이 일본경찰들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선 국기라는 이름 대신 ‘태극기’로 부르자고 약속하면서부터 지금껏 태극기로 그 명칭이 굳어지게 된 것이다.” (‘경제풍월’, 2013년 10월호)


1896년 독립신문 게재된 노래 등에 이미 등장

   그러나 이는 분명히 그릇된 정보이다. 그 이유는 첫째, 1896년에 발간된 독립신문은 독립문 건립에 따른 성금을 모으면서 애국적인 노래들을 소개했는데, 이중에 ‘태극긔’ 혹은 ‘태극기’가 여러 차례 등장하기 때문이다.

 1) 7월 16일 ‘경무학도들 노래’ 중 “대죠션국 태극긔호 세계상에 놉히 단다.” 2) 7월 23일 예수교인 ‘애국가’ 중 “독립공원 굿게 짓고 태극긔를 놉피 달셰.” 3) 8월 1일 박기렴 ‘애국가’ 중 “건곤감니 태극긔를 반공중에 놉히 달면” 4) 9월 5일 김종성 ‘애국가’ 중 “태극긔를 놉히 드러 애국가를 불러보세.” 5) 9월 10일 리영언 ‘애국가’ 중 “독립문을 크게 짓고 태극기를 놉히 달세.”

   그리고 10월 31일자에는 ‘독립가’라는 노래 가사가 실려 있다. 작사자는 당시 조선 정부 농상공부 주사 최병헌(崔炳憲, 1858~1927)이라는 인물이다. 가사는 5절과 각각의 후렴으로 구성되었는데 제4절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한다.

 음양죠판 태극긔를 일월가치 놉히다니

 죠션역시 구방이라 기명유신 차시로다

   천지개벽의 상징인 태극기를 해와 달처럼 높이 달았으니 조선도 비록 오랜 역사를 가졌지만 나라가 지속되려면 바로 이때 개혁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둘째, 1896년 11월 21일 독립문 정초식 행사 때 사용된 전단지에도 태극기라는 명칭이 보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전단지는 그날 의식(儀式)의 노래를 부른 배재학당 학생들을 위해서 제작된 가로 31.6㎝, 세로 23.8㎝ 크기의 한지(韓紙)이다. 여기에는 ‘죠션가’, ‘독립가’, ‘진보가’ 등 3곡의 노래 가사, 그리고 ‘환호’라는 만세 구호(口號)와 배재학당의 교호(校號)가 실려 있다. 이 중에서 8절의 가사와 각각의 후렴으로 구성된 ‘독립가’의 마지막 절(제8절)에 ‘태극긔’라는 단어가 보인다.  

 “태극긔를 놉히 달고 독립가를 불너보세.

 이천만? 일심으로 승평악을 화답하네.”

   ‘승평악(昇平樂)을 화답하네’는 태평성대의 노래를 부른다는 의미이다. 위의 사례들은 1896년에, 즉 3·1운동이 일어나던 해보다 23년 전에 이미 태극기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또한 조선정부가 국기를 반포(1883년)한 지 13년 후에 벌써 우리 선조들이 조선 국기와 태극기라는 명칭을 함께 사용하고 있었음을 똑똑히 보여주는 것이다.

 

‘독립가’의 작사자 최병헌과 안중근 장군의 기록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합창한 ‘독립가’에는 작사자가 표기되지 않았다. 또한 독립신문의 그것과 가사 내용이 일부 다르다. 그러나 두 가사를 유심히 살펴보면 동일인의 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농상공부 관리이자 배재학당 교사였던 최병헌이 역사적인 기념일에 사용하기 위해서 독립신문에 기고한 가사를 보완한 것으로 보인다.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상임이사는 1895년 5월 14일에 이미 ‘독립가’가 발표되었다고 주장했는데, 이것도 최병헌의 작품이 아닌가 한다. 최병헌 목사의 이력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서울 중구의 정동제일교회 앞마당에 들어서면 청동 흉상(胸像) 2점이 눈에 띈다. 하나는 한국인, 또 하나는 외국인 모습이다. 외국인은 이 교회설립자이자 담임목사였던 아펜젤러(Henry G. Appenzeller, 1858~1902)이고, 한국인은 이 교회 최초의 한국인 담임목사로 활약했던 최병헌이다.

   최병헌은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과거를 준비하던 중 '瀛環志略'(영환지략: 1850년 중국의 서계여가 집필한 세계지리책)을 읽고 서양문화의 정신적 지주가 기독교임을 알게 되었다. 1888년 그는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기독교를 소개받았고 존스 등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쳤으며 배재학당의 한문 교사가 되었다. 1893년 세례를 받은 후에는 전도사, 성서번역위원, '조선 그리스도인 회보', '신학월보' 편집인, 농상공부 관리, 독립협회 간부 등으로 활약하면서 개화사상을 역설하는 글을 발표했다. 1902년 아펜젤러가 뜻밖의 선박사고로 사망하자 최병헌은 그의 후임으로 담임목사가 되어 12년 동안 재직했으며 이후 감리교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동양의 고전을 섭렵한 후 서양의 기독교적인 지식과 문물을 접한 그는 우리 재래종교와 기독교사상의 접목을 위한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참고로 당시 ‘독립가’는 찬송가 곡조를 빌려서 연주되었다. 즉, 영국의 도드리지(Philip Doddridge, 1702~1751)가 작사하고 림볼트(Edward Rimbault, 1816~1876)가 작곡한 “O Happy Day, That Fixed My Choice”(주의 말씀 받은 그날)라는 제목의 찬송가 멜로디에 맞춰 ‘독립가’를 불렀다.

   한편 안중근 장군의 자서전인 '안응칠 역사'에도 태극기의 한자 표기인 ‘太極旗’를 볼 수 있다. 1909년 12명의 동지들과 각각 왼손 약지를 자르고 그 피로 태극기 앞면에 ‘대한독립’이라는 네 글자를 크게 썼다는 대목이다.

   위에 언급한 독립신문과 독립문 정초식의 전단지, 그리고 안중근 장군의 기록이 태극기 명칭의 유래에 관한 근거 없는 정보를 시정하는 데 기여했으면 한다.  <이현표 전 주미한국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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