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학연화대합설무 이흥구
임금의 건강 기원 위해 1000년 이어온 전통예술 인간과 동물의 협무·궁중음악과 어우러져 표현 수많은 후학 양성·세계 공연 등 한국무용에 기여 “그래도 육군본부 군악대 복무 시절이 가장 행복"
학연화대합설무(鶴蓮花臺合設舞·이하 합설무)는 1971년 1월 8일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된 궁중 정재(呈才)무용이다. 정재는 대궐 안 잔치 때 춤과 노래를 통해 임금의 덕망과 만수무강을 축수하고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드리던 품격 높은 예술이다. 일반에겐 이름조차 생소한 이 춤은 고려 왕실에서부터 연희해 온 인간과 동물의 협무(挾舞)로 10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한국 고유의 전통예술이다. 합설무의 공연장에 들어서면 함부로 범접 못할 적막과 함께 신성한 기운마저 감돈다.
합설무 무대 중앙에 청사초롱이 걸려 있고 그 양쪽에는 일자로 수놓은 듯 아름다운 꽃이 가지런하다. 영롱한 연통(蓮筒) 두 개가 마주 보고 있는 사이로 청학과 백학이 등장하며 학무를 춘다. 학은 무대 뒤편의 지당판(地塘板·맑은 연못을 상징)을 맴돌며 오탁의 인간세계와 고매한 신선세계를 고고한 몸짓으로 경계 짓는다.
두 마리 학은 부리를 땅에 찍어 먹이를 삼키는 시늉을 하고 긴 숨을 들이켜려는 듯 머리를 들어 하늘을 주시하기도 한다. 가뿐히 날다가 휙 돌아서며 마주하고 부리를 부딪쳐 비벼댄다. 이처럼 상징성 깊은 갖가지 동작으로 고운 춤사위를 이어가다가 우연히 연통 두 개를 쪼아댄다. 순간, 연꽃술이 활짝 벌어지며 그 속에 있던 두 어린 동녀(童女)가 살포시 나온다. 학이 소스라치게 놀라 뛰어나가는데, 여기까지가 학무(鶴舞)다.
연꽃술에서 나온 동녀는 죽간자(竹竿子·대나무로 만든 무구)를 들고 나온 또 다른 무희 2명과 함께 사뿐사뿐 춤을 이어간다. 하늘같이 높은 왕의 공덕을 기리며 접었다 펴는 춤결이 형언할 수 없이 고결하고 고혹적인데 이 춤을 연화대무(蓮花臺舞)라고 한다. 원래는 학무와 연화대무를 따로 춰 왔는데 두 춤을 한 무대서 춘 뒤부터 학연화대합설무(合設舞)로 부르게 된 것이다.
궁중무용의 대작에 속했던 합설무는 통속적 요소의 민속무용과는 그 품격부터 다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이왕직아악부의 국립국악원 양성소를 통해 전수됐는데 그 예맥을 송암(松岩) 이흥구(李興九·75) 인간문화재(1993. 12. 12.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40호 지정)가 잇고 있다. 송암은 한국궁중무용총서 13권을 비롯해 학연화대합설무·처용무 등을 저술한 이 분야의 저명한 학자이기도 한데 국립국악원에서는 1기생 출신인 그의 구술총서 ‘이흥구’를 발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무대에 서면 ‘언제나 춤꾼’이라고 했다.
“학무는 조선 전기 악학궤범에 등장하는 궁중무로 새의 탈을 쓰고 추는 춤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합니다. 선비를 상징하는 학을 등장시켜 동물과 인간의 교감세계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거지요. 음악도 세현산·보허자·삼현도드리 등 궁중음악만 사용합니다.”
학무는 조선 후기 순조(재위 1800~1834) 때 들어서 절정기를 이룬다. 이 무렵엔 왕의 진연(進宴) 시마다 새로운 학무를 만들어 바쳤을 정도로 다양한 정재가 창작됐다. 조선 말기까지 정재홀기(笏記·의식의 순서를 적은 글)가 존재하며 연희돼 왔으나 일제의 국권침탈 이후 단절되고 말았다.
그러나 왕실의 정취가 짙게 밴 궁중무가 쉽게 사라질 리 만무했다. 학춤을 추며 동시대를 살았던 당대 최고의 춤꾼 한성준(1875~1941)이 1935년 서울 부민관에서 이를 재현해 낸 것이다. 김보남·김천흥이 그에게 배웠고 두 김씨는 수제자 송암에게 이를 전수했다. 1995년 학무와 연화대무가 합설로 공연되면서 문화재청의 종목 변경과 더불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충남 보령시 대천읍 화산리에서 3남 3녀의 다섯째로 태어난 송암. 대천초교를 졸업한 그도 상급학교에 진학해 공부하고 싶었지만 가난이 원수였다. 좌절하던 그에게 가뭄 끝의 단비 같은 신문광고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 국비장학생 모집-침식제공 기숙사 완비’. 아버지(이봉훈) 모르게 어머니(박장녀)를 졸라 어렵게 찻삯을 마련했다.
“사람의 직업이 꼭 맘먹은 대로 이뤄지는 건 아니잖습니까. 무용가가 되리라곤 생각도 안 했지만 국악사양성소에 가 한국무용을 전공하게 됐고 어차피 발 디뎠으면 끝까지 해보자는 오기가 생겼습니다. 잠도 덜 자고 놀러도 안 다녔지요.”
송암은 지금도 땟국 절은 종이돈을 쥐여 주며 “배곯지 말고 잘 지내라”고 눈물짓던 어머니와 대천역에서 헤어지던 생각 하면 가슴이 무너진다고 했다. 가난에 절치부심한 송암이 양성소 졸업 후 이뤄낸 개인적 성취와 국위선양은 우리 전통국악사에 큰 획을 긋는다. 국악원 연구원을 시작으로 지도자→안무자→무용감독→예술감독→원로사범을 역임하며 1999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수많은 후학을 양성해 냈다.
이러한 송암의 노력은 학연화대합설무를 조선선비의 품성을 대표하는 전통무용으로 각인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세계 각국의 거듭된 초청으로 현지 무대에 서서는 한국 전통춤과 음악의 상징성을 강렬하게 심어줬다. 그는 합설무를 절묘하게 묘사한 장효표의 시를 즐겨 암송한다.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날아다니는 듯하고/ 모자는 나부끼듯이 은은한 소리를 내며/ 허리를 굽혀 도는 것은 봉황이 뒤엉켜 있는 듯 설레이는구나’
학은 대쪽 같은 선비 품성을 대표하며 연꽃은 시궁에서도 고귀한 꽃을 피우는 순결의 상징이다. 왕조시대 신료 서열은 관복의 가슴·등에 새겨진 학 문양의 숫자로 구분했고 연화세계는 바른 세상을 추구하는 모든 사람의 이상향이었다. 신이 인간에게 전하려는 영성을 학이라는 영물을 통해 전달하고 신의 소리를 대신한다는 궁중악으로 왕실의 존엄을 드러냈던 것이다.
“아직도 우리 전통 국악 속에는 일제 강점기라는 공백 기간 잃어버리고 단절된 게 너무 많아요. 고서와 새로 발굴된 자료를 통해 접하는 심오한 전통문화는 실로 무궁무진합니다. 궁중악·민속악 가릴 것 없이 우리 것을 바로 찾아 올곧게 세우려는 전문적 안목이 절실합니다.”
합설무에는 청학 1, 백학(또는 황학) 1, 동녀 2, 협무 2, 죽간자 2, 악사기 2인이 동원된다. 숭의여전 무용과 손경순 교수가 전수조교이고 이수자로는 송암의 딸인 이명희(40) 씨를 비롯해 70여 명이 넘는다.
그동안 송암은 국내 각 대학의 무용과 교수도 역임하고 대통령 포상과 훈장도 여럿 탔지만 “멋진 군복 멋있게 다려 입고 육군본부 군악대로 복무했던 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말했다. 현재 사단법인 대악회 회장을 겸하고 있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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