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팔도藝人과 천하名匠

걸쭉한 대사에 춤사위 실어 서민 아픔 보듬다

입력 2014. 01. 09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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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양주별산대놀이 노재영 인간문화재


지역 특유의 탈놀이 탄생시킨 대표적 가면극  옴중·취바리 탈 쓰고 부패와 탐욕 꾸짖고  거드름춤·깨끼춤으로 관중들 신명 더해

 

노재영 인간문화재

 


양주별산대놀이의 여러 가지 탈. 조선 15대 광해군 5년(1613). 경기도 양주목사로 부임한 유척기(兪拓基)는 임진왜란으로 상처 입은 전후 민심의 수습책이 절실했다. 유 목사는 서울의 산대(山臺)놀이 전문 연희집단인 ‘딱딱이패’를 초청해 양주 유양동에 무대를 개설하고 주민과 널브러져 마음껏 놀게 했다. 그때 서울에는 사직동 아현동 노량진 녹번동 구파발 산대놀이패가 유명했는데 팔도 각지의 부름을 받아 큰돈을 받고 공연했다. 백정 상두꾼 건달들로 구성된 이들 놀이패는 자신들이 만든 탈을 쓰고 부패한 사회상과 무능한 양반들을 통쾌하게 조롱했다.

 날이 갈수록 인기가 충천해 ‘귀한 몸’이 되며 거만해진 이들의 위세는 행패로 변했다. 공연 시마다 가욋돈을 요구했고 마음에 안 들면 지방공연을 핑계 삼아 예약을 파기했다. 화가 난 양주 고을 주민들이 하나로 뭉쳤다. 1800∼1830년대 유양동에 살던 이을축(李乙丑) 목수가 노경무 유인혁 등과 함께 서울 탈을 본떠 제작한 뒤 마을 사람들에게 이를 씌워 산대놀이를 재연한 것이다.

 이후부터 양주에선 서울 놀이패는 본(本) 산대라 부르고 양주 놀이패는 별(別)산대로 구분 지어 그들만의 가면(탈)극으로 새롭게 발전시켰다. 양주별산대놀이가 활착에 성공하며 전국 각 곳에는 현지 주민에 의한 탈놀이 문화가 독립적으로 뿌리내리게 됐다. 세월 따라 본산대놀이가 소멸돼 탈놀이 하면 양주별산대놀이를 떠올릴 만큼 대표 탈놀이로 뿌리내렸다. 이 놀이는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소개돼 있다.

 산대는 서울·경기지역에서 탈놀이를 연희할 때 만들었던 하나의 무대장치로 그것이 산붕(山棚)처럼 높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산의 형상을 본떠 연희자들의 권위를 과시했고 한 장소에 고정해 놓은 대(大)산대와 밑에 바퀴가 달려 이동할 수 있는 예(曳)산대를 장소에 따라 사용했다. 놀이패는 4월 초파일, 5월 단오, 7월 백중, 8월 추석, 기우제 등에 동원됐고 때로는 궁중행사에 초청되기도 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그 역사(1800∼30년)와 발상지(양주 유양동)가 뚜렷해 일찍이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1964. 12. 7)됐다. 현재 유양동에는 이곳에서 나고 자라 32세 때 초대 인간문화재로 지정된 후 51년 동안 별산대놀이를 하고 있는 화석 같은 존재가 있는데 노재영(載永·83) 씨다. 자택에서 만난 그는 옹(翁)이 아닌 씨(氏)로 불러 달라고 당부했다.

 “15년 전 위암수술을 받아 힘든 일은 별로 못하는데 놀이판에만 나가면 펄펄 날라요. 몸이 까부라져 있다가도 옴중과 취바리 탈을 쓰고 놀던 생각하면 어깨 힘이 절로 납니다. 아마도 별산대놀이가 아니었으면 난 벌써 저 세상 사람이었을 거요.”

 옴중은 전신에 옴이 올라 쉴 새 없이 긁적거리는 파계승이고 취바리는 절간에서 불 때고 심부름하다 세월 보낸 늙은 총각이다. 둘이 별산대놀이의 핵심 배역인데 탈로 얼굴을 가린다는 익명성을 활용해 세상의 온갖 부정비리와 양반들의 탐욕을 가차없이 능멸한다. 둘은 남녀 간 갈등이 담긴 대사로 서민 생활 실상을 드러내고 육두문자를 통해서는 특권계층의 도덕성에 대한 저항정신을 적나라하게 표출한다.

 ①상좌마당 ②옴중마당 ③먹중마당 ④연잎·눈끔쩍이마당 ⑤팔먹중마당 ⑥노장마당 ⑦샌님마당 ⑧신할아비·미얄할미마당의 8과장으로 연희되는 별산대놀이는 동작의 선이 굵지 않으며 흥청거림 없는 춤사위가 발군이다. 민속학계서는 별산대놀이의 사실적 가면과 다양한 춤 속에서 한국 전통 민속춤의 원류를 추적해 낸 바 있다.

 몸속 마디마디에 멋을 집어넣고 염불장단에 맞춰 추는 거드름춤과 타령 장단으로 몸속의 멋을 풀어내는 깨끼춤이 우리 전통 민속무의 두드러진 내공인데 별산대놀이 춤 속에는 두 춤사위가 적절히 녹아 있는 것이다. 손목과 고개를 까딱까딱하며 깔끔하고 산뜻하게 처리하는 춤 동작이 흥을 절로 유발시키고 어느새 관중은 일어서 연희자를 따라 춤을 추게 된다.

 별산대놀이는 가무 중심의 다른 지역 탈놀이와 달리 풍부한 대사를 통해 집단적 신명풀이로 승화시킨 독특한 가면극이다. 특히 옴중과 취바리의 대사는 너무 노골적이어서 예부터 이 둘이 등장할 무렵이면 부녀 관객들은 물러가는 것이 상례였다고 한다. 신이 난 노씨에게 취바리 대사 한 소절을 요청하니 선뜻 일어나 덩실덩실 깨끼춤을 추며 주저없이 읊어댄다.

 “요즘엔 공연장에 나가 이 대사를 풀어내도 여성 관객들이 자리를 뜨기는커녕 깔깔대고 웃으며 더 큰 손뼉을 칩니다. 오히려 남자들이 눈치 보며 겸연쩍어해요. 내 그 박수 소리에 취해 젊음을 불태우다 보니 어느덧 80을 훌쩍 넘겼습니다만 후회는 없소이다.”

 노씨는 양주 유양동과 별산대놀이와의 역사적 인과관계를 설명했다. 별산대놀이의 비조(鼻祖)인 이을축이 목수로 탈 제작자인 데다 노장 역을 맡았던 놀이꾼이었고 유양동 태생이었다. 자신도 목수 일을 하다 역시 유양동 출신인 김성태 박준섭 이장손 김성대 박상한 씨 등 걸출한 놀이꾼을 만나 인간문화재까지 되었다는 것이다.

 발산대기(旗)와 영기(令旗)를 앞세운 연희자들의 길놀이로 시작되는 별산대놀이는 원래 32개 배역이나 겸용하는 탈을 제외하면 실제 가면 수는 22개다. 한때는 유양동에서 6명(석거억 유경성 신순봉 고명달 김상용 노재영)의 인간문화재가 배출되기도 했는데 서로 스승 제자나 선·후배 사이였다. 현재는 해산어멈 역을 맡은 김순희(80) 예능보유자(2002. 2. 5 지정)와 2명(김순홍 석종관)의 전수조교가 있고 이수자는 박진현(양주별산대놀이보존회 사무국장) 씨 외 18명, 전수자는 김승룡 씨 외 8명이다.

 “봉건사회 양반들은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나눌 줄을 몰랐어요. 못 가진 자의 아픔과 슬픔을 헤아리지 못하니 양주별산대놀이 같은 저항성 짙은 가면극이 정착된 것 아니겠습니까?”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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