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완결 팔도藝人과 천하名匠

하나된 민·군, 거친 파도에 맞서 ‘풍어 기쁨’ 만끽

입력 2013. 11. 14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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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좌수영어방놀이 박등무 인간문화재


  경상좌도 수군절도영이 주둔하던 부산시 수영만은 강과 바다가 잘 갖춰진 항만으로 온화한 기후에다 넉넉한 인심으로 평화로운 고장이었다. 주민들은 좌군이 수영에 머문다 하여 좌수영(左水營)이라 불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조정은 인근의 축산포(영해)·칠포(흥해)·포이포(장기)·감포(경주)·개운포(울산)·두모포(기장) 등지에 있던 수군을 수영 본영으로 집결시켜 1만 명이 넘는 병사들을 포진시켰다. 좌수영의 당면 과제는 엄청난 군량미와 부식 조달이었다.

원형 그대로 간직한 해안지역 특유의 어로 민속놀이 전세계에 우리 놀이 문화 알리며 한류의 세계화 기여

 수군절도사가 궁리 끝에 기지를 발휘했다. 현지 어부와 비번 수군의 힘을 합쳐 고기를 잡게 한 것이다. 어부는 고깃배를 내놓았고 수군은 항해술과 노동력을 제공했다. 어획량이 증가하자 어민들은 신이 났고 주둔군의 부식 공급도 원활해졌다. 나아가 외적 침범의 유사시에는 어선이 군선으로 동원돼 국방에 힘을 보탰고, 어부들은 수군보조원으로 적군을 무찔렀다.

 민·군 간 일치로 상호보완적 관계를 설정한 지역 주민과 군인은 어부와 수군의 공동어로 작업체인 어방(漁坊)을 결성했다. 오늘날 수산업협동조합(어촌계)의 전신이다. 현종 11년(1670)에는 상설기구로 수영성(城)에 어방을 두고 조업기술을 지도하며 어민의 어업 권장과 진흥을 꾀했다. 어방 계원들은 거친 파도와 싸우는 고된 어로작업을 여럿이 노래하는 어로요(漁撈謠)로 승화시켰는데, 이것이 좌수영어방놀이(이하 어방놀이로)다.

 이들은 어방놀이를 하기 전에 먼저 바다 용왕한테 어부의 안전과 풍어를 기원하는 용신제(龍神祭)를 올리며 간절히 축원했다. “동서남북 놀던 고기는 우리 그물에 들게 하소/ 잡귀 잡신도 막아 주고 손재수도 막아 주고/ 일 년 열두 달 삼백육십오 일 재수소망 있으시고/ 우리 어부들 만수무강하시기를 용왕님 전에 비나이다.”

 오랜 민족의 전통놀이도 망국과 함께 쇠운을 맞는다. 어방놀이는 고종 32년(1895) 수군영이 폐지된 이후에도 불렸으나 일제강점기 들어 강제 소멸되고 만다. 민·군이 하나가 돼 일본군을 격퇴시킨 어방놀이를 일제가 그냥 놔둘 리 없었기 때문이다. 수영만에서 어부들이 후릿그물로 고기를 잡으며 부르던 어로요는 영영 사라지는가 싶었다.

 그러나 전통예술과 예인의 맥은 강압이나 인위적으로 단절되는 게 아니다. 1971년 2월 24일 이 지역 민속놀이인 수영야류(본지 9월 27일자 보도)가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43호로 지정되자 일제 때 어방놀이를 주관했던 생존자들이 크게 자극을 받아 복원에 나선 것이다. 이미 작고한 박남수(어로장)·한만식(어로요·창)·김봉태(어구제작 및 악사)·박항기(악사) 등이었다.

 이들의 놀이에 대한 증언과 재연은 일관되고 완벽했다. 1978년 5월 9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좌수영어방놀이를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62호로 지정받았고 네 명 모두 초대 인간문화재가 됐다. 이 중 박남수(1914∼1989) 어로장 역의 아들 유곡(幽谷) 박등무(朴藤茂·74) 인간문화재(1992. 7. 1 지정)가 다시 어로장 역을 맡아 놀이의 탄탄한 맥을 2대째 잇고 있다.

 “예로부터 수영 사람들은 소리 잘하고 신명 많기로 유명해 놀 줄 모르는 사람 없다고 했습니다. 저도 어릴 적부터 아버지 따라 고기 잡는 어로요를 부르며 성장했고, 현재까지 좌수영어방놀이 속에 묻혀 살고 있습니다.”

 유곡은 부산공업전문대학에서 화공학을 전공했으나 정작 일생은 예인의 길이었다고 굴곡 많았던 70평생을 술회한다. 그는 부산시 수영구 광안동 845번지에서 태어나 지금도 수영구 수영동에서 살고 있다. 좌수영어방놀이보존회 회장직을 맡아 보존회 가입 후 1년의 수습 기간과 5년의 이수자 활동을 거쳐야 응시자격이 주어지는 전수조교를 교육시키느라 여념이 없다.

 어방놀이는 ①후리질을 하기 위해 줄 틀로 줄을 꼬는 내왕소리 ②그물을 친 후 그물을 잡아당기는 사리소리 ③잡은 고기를 가래로 퍼 옮기는 가래소리 ④어부들이 풍어를 자축하는 칭칭소리의 네 마당으로 구성돼 있다. 노랫가락은 영남지방에서 신명 날 때 부르는 쾌지나칭칭나네로 가사 일부는 현장 분위기에 따라 바뀌기도 한다.

 “메리치 꽁치는 바다에 놀고/ 살찐 가무치는 연담에서 놀고/ 뒷집 큰 애기 내 품에서 논다/ 은전 금전도 여기서 나고/ 정승 판서도 여기서 난다.”

 어로장의 선창과 함께 휘모리(가장 빠름) 가락으로 신바람을 몰고 다니는 악사가 흥을 돋우면 기수·선주·방수(坊手)·북재비·선소리꾼·어부들이 둥글게 원을 그린다. 이어 대가레·중가레·소가레 광주리를 머리에 인 여인들이 뒤를 따라 춤을 추며 놀이마당은 절정에 이른다. 놀이는 바다에 나가 많은 고기를 잡고 만선으로 무사히 돌아오길 기원하는 비나리로 대미를 장식한다.

 “좌수영어방놀이 덕분에 중국·일본·대만·태국·그리스 등을 순회공연하며 현지 문화계 인사들과도 빈번히 만났습니다. 우리 놀이문화의 진수와 열정에 하나 되는 그들을 통해 일찍이 한류의 세계화를 내다본 바 있습니다.”

 봄은 멸치·숭어, 여름엔 농어·붕장어, 가을의 꼬시라기(망둥이)·전어, 겨울에는 먹장어·갈치가 부산에는 지천이다. 유곡은 일본 관광객들이 부산을 찾아 이곳 해산물을 즐기며 ‘선택 코스’로 좌수영어방놀이를 관람할 때마다 감회가 새롭다고 했다. 역사의 앙금을 문화적 소통으로 씻어낼 수는 없는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는 다른 해안 지역에서도 특색 있는 어로 민속놀이가 전해져 왔으나 현재는 원형이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민속학계서는 대도시인 부산에서 멸실된 전통 어방놀이를 복원시켜 민속 축제로 보존시킨 것에 대해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수영구(區)라는 한 지역에 서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를 두 종목이나 보유하고 있는 것도 드문 사례다.

 바다를 일구며 살아가는 사람들. 농부에게는 논과 밭이 삶의 터전이듯 어부들에겐 너른 바다가 문전옥답이고 생업의 현장이다. 첨단 어로 기술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자연 재앙으로 닥치는 해난사고는 불가항력일 수밖에 없다. 이래서 바다를 껴안고 살아가는 해안마을 사람들은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놀이와 굿판의 공동체에 뛰어들어 서로 위안받았는데, 이때 동원된 전통의 우리 가락과 소리와 춤이 지금 세계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좌수영어방놀이보존회는 김태용(82·악기) 공동예능보유자와 전수조교 3명을 포함한 다수의 이수자가 매년 1회 정기연희를 펼치며 외부 팀과의 초청·원정공연도 갖는다.

 


<이규원 시인·‘조선왕릉실록’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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