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과 밤을 표현하는 흰색과 검은색 다음으로 처음 나타난 유채색(有彩色) 이름이 붉은색이다. 인간의 생존에 있어 출산·사냥·죽음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피로써 붉은색을 지각하는 것은 순리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붉은 피는 때로는 두려움과 경이로움이기도 했으며, 분노 혹은 고통이 따르는 가장 인상적인 기억색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붉은색은 곧 생명이다.
최근에 개봉한 영화 ‘허삼관’은 그 붉은 생명, 피를 파는 이야기다. 가난한 노동자 허삼관은 위기의 순간마다 가족을 위해 자신의 피를 뽑아 판다. 특히 11년간 남의 아들을 자신의 아들로 알고 살아온 것을 괴로워했지만, 결국 병에 걸린 그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자신의 피를 판다. 부성애에 기댄 가난하고 아픈 중국의 현대사 ‘허삼관매혈기’를 원전으로 하고 있다. 그의 붉은 피는 혈연보다 진한 사랑이다.
또한 붉은색은 용맹함으로, 전쟁 속 영웅을 다루는 회화에서 자주 발견하는 색이다. 고전주의의 대표 작가 다비드가 그린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에서 나폴레옹은 멋진 백마를 타고 손을 높이 들어 지휘하는 늠름한 모습이다. 그의 군복 위에 펄럭이는 망토는 붉은색으로 전장의 영웅적 면모를 보다 극적으로 표현한다.
전투 이미지는 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이렇듯 과장되게 표현하는 일이 흔했다. 폴 들라로슈가 그린, 같은 주제의 ‘알프스를 넘는 보나파르트’에서는 나폴레옹이 힘 빠진 노새를 탄 채, 창백하고 초췌한 얼굴로 힘겹게 산을 넘는다. 보다 현실적으로 그렸지만 폴 들라로슈의 초라한 진실보다 다비드의 스펙터클한 허구에서 용기를 보게 되는 것이다.
붉은색은 로마의 신화 속 전쟁의 신, 마르스(Mars)의 색이기도 하다. 마르스는 붉은 행성인 화성으로 3월에 속하며 별자리는 전갈자리다. 그래서 적극성과 용기를 상징하기도 한다. 북유럽 신화의 영웅 지크프리트가 용의 피를 뒤집어쓰고 불사의 몸이 됐다는 것도, 붉은색이 강력한 힘을 부여하는 색이라 믿는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은 80번의 항공전 승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최고의 에이스다. 그는 전투기를 붉게 칠했으며 붉은 남작으로도 불렸다. 푸른 창공을 배경으로 한 그의 붉은 전투기는 적에게 그의 용맹함을 드러내기 위한 위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빨간 머플러를 착용했다.
‘빨간 마후라’는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1964년 신상옥 감독의 영화다. 극 중 강릉 공군전투기지에 도착한 조종사들에게 빨간 마후라가 지급되는데, 상관은 “빨간 마후라는 조종사의 자랑이며, 불타는 애국심이고 피처럼 붉고 맑은 양심을 상징한다”고 말한다. 해병대의 상징, 붉은 명찰도 용기를 의미한다. 붉은색은 이처럼 용기를 주고 의지를 불태우게 한다.
한편 영국인들은 11월 11일에 제1차 세계대전 희생자를 기념하기 위해 단춧구멍에 붉은 양귀비를 꽂는 관습이 있다. 양귀비는 군인의 피를 상징한다. 겨울 차디찬 무채색의 공간에서 붉은색을 떠올려 본다. 생각해 보면 생명, 사랑, 소중한 것들을 지키는 자리에는 수없이 많은, 붉은 용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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