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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징비록: 대동강 방어전투와 왕성탄

입력 2015. 05. 07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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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비록은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 7년 동안의 전쟁 상황을 직접 체험한 내용을 기록한 글로서 국보 132호다. 최근 모 방송국에서 광복 70년 특집으로 방송하고 있다. 안보학 교수로서 대학생들을 가르치는 처지에서 ‘징비록’을 이해하기 위해 읽었다. 드라마를 보고 책을 읽으며 느낀 대동강 방어전투의 왕성탄에 관해 얘기하고자 한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은 700여 척의 함선으로 부산포를 점령함으로써 7년의 임진왜란이 시작됐다. 침략 20여 일 만에 왜적은 한양을 점령했다(5월 3일). 임진강 방어선도 적의 유인책에 걸려 무너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평양에서 영변으로 파천한다(6월 11일). 조정에서 좌의정 윤두수에게 평양 방어를 명했다.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이원익 등과 같이 평양을 지키도록 했다. 이때가 6월이었지만 한동안 비가 오지 않아 대동강 물은 줄어들고 있었다.

 왕성탄은 징비록에 따르면 대동강 부벽루 아래 능라도 가까운 나루터로 기록돼 있다. 이런 상황에서 왜적들이 대동강 모래밭에 진을 치고 수일 동안 주둔하면서 경비가 해이해졌다. 성 위에서 그런 행태를 지켜보던 도원수 김명원은 어둠을 타고 기습하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날쌔고 용감한 군사를 선발해 왕성탄을 통해 야간 기습을 단행했다. 애초 계획은 삼경(23시~01시)에 적을 치기로 했다. 그런데 그만 때를 놓쳐 강을 건넜을 때는 먼동이 트고 있었다. 적진 장막 안을 살펴보니 왜적들은 아직 자고 있었다. 왜적 1진을 공격했다. 우리 군사들이 활을 쏘아 적을 많이 죽였다.

 그러나 얼마 뒤 왜적들이 반격하면서 살아남은 군사들이 왕성탄을 첨벙첨벙 건넜다. 왜적은 그제야 그곳의 물이 얕아 배 없이도 건널 수 있음을 알게 됐다. 그날 저녁 왜적이 왕성탄을 건너기 시작했다. 이렇게 되자 좌의정 윤두수는 저녁에 성문을 열어 백성들을 모두 내보내고 병기와 화포는 풍월루 앞 못 속에 가라앉혔다. 그리고 남은 군사들과 같이 성을 빠져나갔다. 6월 15일 왜군은 평양성에 무혈 입성했다.

 임진왜란 당시 대동강 방어전투를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하나는 지형의 중요성이다. 왕성탄은 우리만이 아는 중요한 지형지물이었다. 초기 기습공격에서 조선군이 이용했으나 왜적에게 노출당해 적이 공격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했기에 철옹성 평양성은 무너졌다.

 다른 하나는 훈련의 중요성이다. 야간 기습공격을 야간에 시작하고 동이 트기 전에 완료하고 복귀했어야 했다. 그러나 먼동이 트면서 공격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면 조선 군사들이 훈련이 안 돼 있다 보니 기습을 위해 준비하고 이동하는 데 시간이 지체됐을 것이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 할지라도 훈련이 안 돼 있으면 작전목표를 달성할 수 없다.

 류성룡의 징비록은 6·25전쟁 65주년이 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국가안보 최후의 보루인 장병들이 지형지물의 중요성과 훈련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창조국방의 시작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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