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연말 전역했다. 정훈장교로만 30년 넘게 전국 각지의 공군부대에서 근무했다. 업무상 보람 있는 일도 있었지만 가슴 아픈 기억들도 많이 있다.
벌써 한참 전의 일이지만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 하나 있다. 2006년 어린이날 블랙이글 조종사였던 故 김도현 소령이 수원기지에서 어린이날 행사 축하비행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순직했다. 낮은 고도에서 추락한 탓인지 시신이 크게 훼손되지 않았는데, 그의 오른손은 숨결이 떠난 지 한참인데도 조종간을 굳게 붙들고 있었다.
추락 전 찰나의 순간 김 소령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지나갔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난 그 손의 모습을 통해 김 소령을 비롯한 우리 대한민국 조종사들의 애국심과 충성심, 그리고 희생정신을 가슴 뜨겁게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비행은 지상에서 지켜보는 시민들의 자부심이자 어린이들의 꿈이었다. 그리고 그는 추락 순간에도 조종간을 놓지 않고 어떻게든 애기(愛機)를 컨트롤하려고 분투했으리라. 자칫 대형 참사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그 자리의 누구도 다치지 않았다. 오직 김 소령만 가족과 동료들의 곁을 떠났다. 조종사들에게 전투기 조종석(Cockpit)은 그런 곳이다. 무거운 헬멧, 하체를 옥죄는 지슈트(G-Suit), 고가속 기동에 의한 피쏠림, 음속을 넘나드는 속도, 극도의 긴장감, 고독, 그리고 순간 순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모 일간지에서 공군 비행단장들이 전투기를 타고 장군단 전술토의에 참가해 논란을 빚고 있다고 지적했다. “작전상황도 아니고 평시 전술토의에 전투기를 자가용처럼 이용했다는 건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기사에 적힌 대로 정말 공군지휘관들은 회의 참석을 위해 전투기를 자가용처럼 이용했고, 그래서 국민의 혈세를 낭비했다는 말인가?
전투기를 타는 일선지휘관과 조종사들의 애환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할 생각도 못할 것이다. 전투기 조종사들은 비행 전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한다.
기상, 활주로 상황, 임무 성격, 민항기와의 분리, 비상시의 조치 절차, 비상탈출 시 생존법 등을 연구하고 브리핑한다. 정비사들과 함께 항공기의 조종면, 랜딩기어 등을 최종 점검하고 이륙 승인을 받는다. 이륙하는 과정만 해도 중력가속도의 서너 배에 달하는 무게를 견뎌야 한다.
비행시간이 3000시간에 육박하는 장군 조종사들도 비행 준비의 부담과 긴장감은 다르지 않다.
이런 과정을 무시하고 어떻게 개인적으로 편히 타는 자가용과 유사시 중대임무를 위해 목숨 걸고 타는 전투기를 동일시할 수 있는지 안타깝기 그지없다. 더욱이 혹시 모를 오해를 막기 위해 공군 관계자가 비행단장들의 지휘비행과 전투기 타 기지 전개훈련을 겸한 쏘티라고 상세히 설명하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한 F-16 조종사가 사석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조종석에 오를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뇐다. ‘넌 멋진 놈이야. 오늘 당장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수백억의 고가치 자산과 운명을 함께할 테니’라고.”
문제의 기사 때문에 지금 이 순간에도 무거운 지슈트로 몸을 조이고 수만 피트 상공과 비상대기실에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는 빨간마후라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전 공군본부 정훈공보실장
최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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