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무렵 2군단장으로 전보명령(10월 23일자)을 받았다. 1사단장은 부사단장이던 최영희 준장이 맡고, 나는 개천군 군우리 2군단사령부로 가서 전임 유재흥 소장으로부터 지휘권을 이양받았다. 유소장은 육군참모차장에 보임돼 서울로 떠났다.
그러나 영전이라는 기분을 느낄 수 없었다. 2군단 정면에도 중공군 대군이 출현했기 때문이다. 나는 전황을 직접 점검하기 위해 예하 사단으로 향했다. 6사단장 김종오 준장은 동룡굴의 적 지하 병기창을 둘러보다가 차량사고로 턱을 크게 다쳐 말도 못하고 누워 있었고, 예하 2연대와 7연대는 중공군에 의해 고립돼 고전 중이었다.
특히 압록강 최북단까지 진출했던 임부택(林富澤) 7연대장은 “탄약과 보급품이 소진됐다. 급히 공수해 달라”는 무전을 애타게 보내 오고 있었다. 19연대만이 희천에 남아 후속 진출하는 8사단을 엄호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8사단은 아직 접적하지 않았지만, 사단장 이성가 준장은 “중공군이 나타났다는 말에 장병들 사기가 침체돼 있다”고 걱정했다.
유재흥 소장으로부터 지휘권 이양
군단사령부로 돌아와 미 수석고문관 질레트(Gillet) 대령, 군단참모들과 모여 앉아 보급품 공수 방안을 고심하던 중 뜻밖에 육본으로 갔던 유재흥 소장이 다시 나타났다.그는 나에게 “어, 다 또라가라 그래!” 했다. 일본에서 자란 영향인지 유소장의 우리말 발음은 명확지 않았다. 육본에서 현 사태가 수습될 때까지 다시 원래 직책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나는 사흘 만에 다시 1사단장으로 복귀했다.
10월 28일 나는 사흘 만에 다시 청천강을 건너 영변으로 향했다. 청천강의 수중교를 지프로 건너며 조여 오는 긴장감을 달랬다. ‘…이제 상대는 중공군이다. 그것도 수십 개 사단 규모의 엄청난 대군이 우리의 퇴로를 차단해 섬멸하려는 것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전쟁이다.’ 영변 1사단사령부에 돌아와 보니 그동안 운산에 갇힌 1사단은 주야로 중공군과 대치하며 힘겹게 싸우고 있었다.
다음날 사단이 처한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운산으로 향했다. 문형태 작전참모를 대동하고 운산으로 들어가다 낙타 목처럼 강물이 굽이친 S자 커브 길 약 300m 전방에 일단의 중공군이 길을 차단하고 있는 것을 보고, 황급히 차를 돌려 다시 용산동으로 되돌아와 우회로를 따라 간신히 운산으로 들어갔다.
'평양탈환 환영대회' 행사 참석
그때 나는 지프에 유사시를 대비해 천막·모포·일용품 등을 실은 짐 트레일러를 달고 갔는데, 급히 차를 돌리려니 트레일러가 걸렸다. 그걸 분리해 차를 돌린 다음, 다시 연결하느라 지체된 수십 초의 순간이 굉장히 긴 세월처럼 느껴졌다.
운산에 가 보니 읍 북쪽 좌측에서부터 12·15·11연대 순으로 사주방어를 하고 있었고, 그 후방에서 미 전차대대와 고사포군단이 지원사격을 하고 있었다. 장병들은 밤마다 계속되는 중공군과의 전투에 상당히 지쳐 있었고, 동계피복을 지급받지 못해 고통을 받고 있었다. 또 중공군에 대한 공포심으로 사기가 저하돼 있었다.
이 무렵, 나는 잠시 평양에 다녀와야 했다. 그것은 10월 30일, 정부의 ‘평양탈환 환영대회’ 행사에 참석할 이승만 대통령 영접·경호차 간 것이다. 이대통령은 신성모 국방부장관과 정일권 육군총참모장을 대동하고 프란체스카 여사와 함께 평양공항에 내렸다.
사단장 1호차 앞자리에 이대통령이 타고, 경호를 위해 그 뒷자리에 프란체스카 여사를 모시고 내가 탔다. 평양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평양시청으로 이동하는 동안 잠시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평양시청 앞 광장에서 열린 환영대회에서 시민들은 이대통령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평양시청 건물 벽에 나붙은 대형 태극기와 환영 현수막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평양을 되찾기에 신명을 바친 감개가 새로웠다.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정리=문창재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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