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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분석 통해 바라본 ‘또 다른 6·25 비화’

이영선

입력 2015. 06. 24   1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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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견 전방부대 정찰활동에 적극 운용 중공군에 효과 커

전사상자 발생 시 헬리콥터로 후송 혁신적인 변화 많아

8240부대, 고향 땅 수복 위해 北군 후방서 소규모 습격

 

 

 

 6·25전쟁사 연구의 또 다른 도약이 이뤄질 전망이다.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미 육군 6·25전쟁 연구분석 프로젝트 자료’를 통해서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는 2013년부터 2년 동안 이 자료를 미 육군 군사연구소로부터 전량 확보하고 분석에 들어갔다.

 이 자료는 미 육군 군사파견대(US Army Military History Detachment: MHD)가 6·25전쟁 기간 중 주요 전투 및 전투(근무)지원 분야를 연구·분석한 문서다. 현재까지 확인된 전체 분량만 총 38편. 그동안 학자들로부터 ‘6·25전쟁 1차 사료의 정수’로 평가받아온 만큼 새롭게 밝혀진 내용이 다수다. 군사편찬연구소는 우선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제1편부터 20편까지를 총 8권으로 나누어 묶었다. 자료의 방대함만큼 일차적으로 각 편별로 세부 목차와 간단한 요약 형태인 해제를 정리해 실었다. 국방일보는 군사편찬연구소의 협조를 받아 이번에 발간하는 해제집 8권에 담긴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 제26군견대 운용


6·25전쟁 동안 미8군 예하의 26군견대는 각 사단에 배속돼 400회 이상의 정찰활동을 실시했다. 군견은 모두 독일산 셰퍼드로 이들은 공산군의 매복 감지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26군견대는 부대장(상사)을 필두로 민간훈련원 1명과 군견 운용병 18명, 27마리의 군견으로 구성됐다. 이들은 1952년 3월 미40사단과 2사단에 배속돼 그해 가을부터 전방 부대의 정찰활동에 적극 운용됐다. 특히 개를 무서워했던 중공군에게 상당한 효과를 거뒀다.

 한편 미군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군견을 적극 운용했는데 당시 군견의 수가 1만 마리를 웃돌았다. 2차 대전 후 군견대는 대부분 해체됐고 미 극동사령부에는 총 6개의 군견대가 있었으나 6·25전쟁 발발 직전 모두 미 본토로 복귀했다. 이후 26군견대만 남았다.

 

● 외과병원 운용


 사단급 부대 후방지역에 외과병원을 운용하는 개념은 2차 대전 이전에 개발됐지만 실제 전시 운용 사례는 많지 않았다. 미군은 6·25전쟁에서 이러한 개념을 전장에 적극 도입해 부상자들의 생존율을 높이는 데 많은 노력을 쏟았다.

특히 6·25전쟁 기간에는 공격 및 방어 시 의무계획의 수립과 적용, 연대급 전투부대 예하의 중대급 의무부대 편제 운용, 전투간 전사상자 발생 시 헬리콥터를 이용한 후송 등 혁신적인 변화가 많았다.

하지만 육군 차원의 교범은 작성되지 않았고 6·25전쟁 중 이에 대한 집중적 연구가 후일 미 육군 의무교범의 기준이 됐다. 연구는 1950년 7월 미 육군 외과병원으로서는 한반도에서 처음 운용된 제43외과병원을 기준으로 제44, 45, 46, 47, 48 외과병원과 노르웨이 외과병원의 연대기를 함께 다루고 있다.

또한 6·25전쟁은 이전에 시도되지 않았던 이동식 외과병원과 정형외과·치과 등이 처음으로 운용돼 향후 의무교범 작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전차 운용



 전쟁 초기 북한의 신속한 남침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전차는 이후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비록 북한이 전차 덕분에 파죽지세로 남한 대부분을 점령하는 데 큰 도움을 받았지만 근본적으로 한반도의 지형과 기상은 전차 운용에 적합하지 않았다. 실제 1951년부터 전투 양상은 기동전이 아닌 진지전 형태를 보이며 전차의 활용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은 전차를 적 벙커 파괴를 위해 직사화력으로 운용했고 방어 시에는 진지에 배치하는 시도를 했다. 특히 미9군단은 1952년 12월 방어작전에 전차의 적극 운용 지시를 하달하기도 했다. 문서는 1953년 1월 약 20일간의 관찰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화력 지원을 위해 전차를 고정 운영했을 때의 문제점과 해법, 배치 계획, 진지에 운용할 때의 전차 이동방법, 진지상 운용 모습 등이 기록돼 있다.

 


● 유격군의 작전활동



 6·25전쟁 기간에 미군, 그중에서도 정보참모부는 전선 이북에 활용할 수 있는 인간정보자산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동양인과 외모가 확연히 다른 미군이 적 지역에서 정보활동을 펼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서해안 도서 일대에서 자체적으로 편성된 한국군 유격대가 미군에 탄약 지원을 요청했다. 이들은 주로 황해도 지역에서 생활하다 전쟁 발발을 전후해 탈북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공산주의 타도와 고향 땅 수복을 위해 북한군 후방에 대해 소규모 습격을 가하고 있었다. 이들이 후일 제8240부대로 명명된 3만여 명 규모의 유엔 유격군의 모태가 됐다.

 문서는 8240부대의 배경과 주요 활동, 주요 작전 경과 및 성과, 주요 부대장들과의 인터뷰를 다루고 있다. 8240부대가 군번도 이름도 없이 작전활동을 펼쳤고, 이들에 대한 공식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문서는 더욱 큰 가치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이영선 기자 < ys119@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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