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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여름 햇살이 뜨겁던 지난 11일 의암호가 바라보이는 춘천지구 전적기념관 앞으로 주름살 가득한 초로의 병사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포성 소리 가득하던 당시를 회상하는 노병들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그들은 어느새 북한의 기습남침으로 모든 전선이 순식간에 밀려날 때 유일하게 방어선을 유지하며 3일이라는 소중한 시간을 벌어준 구국의 전투, 춘천지구전투의 용사들로 돌아갔다.
맨몸으로 화염병 가지고 탱크 돌진 2대 부숴
전쟁 발발 당일인 1950년 6월 25일 김용철(85) 옹이 속했던 국군 6사단 19연대 2대대 6중대는 원주에서 대기 중이었다. 비상출동해 춘천역에 도착한 것이 26일 새벽 4시30분. 그의 부대는 곧바로 인민군의 춘천 진입 관문인 모진교로 투입된다. 이미 전방부대는 무너져 내려오고 있었다. 북한군 탱크(당시 국군은 북한의 SU-76 자주포도 탱크로 오인했다)가 굉음을 내며 모진교에 올라섰다.
김종오 6사단장이 그걸 미리 짐작하고 2대대를 모진교에 배치했어. 그런데 대전차포와 로켓포로 맞췄는데도 탱크한테는 안 되더라고. 그래서 우리가 탱크 두 대를 육박전으로 잡았어. 엔진에다 불내고 캡이 열리면 그 속으로 수류탄을 던진 거야. 포가 안 되니까 사람이 직접 가서 몸을 던진 거지. 우리가 화염병 가지고 탱크 부수는 데 킬러였어!" -김용철
당시 이 지역 국군은 6사단 병력 9000여 명뿐으로 전차와 자주포를 앞세운 3만6000여 명의 북한 2군단에 비해 병력 면에서 4배, 화력 면에서 10배 이상의 절대 열세였다. 애초 북한군은 공격 당일 춘천과 홍천을 점령한 뒤 수도권으로 우회 기동해 국군 주력을 격파하려는 작전계획이었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6사단의 준비된 방어전에 소양강 도하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전우 쓰러져도 쳐다도 못 보고 앞만 보고 싸워
김상업(87) 옹은 전쟁 5일 전인 20일 2연대 1대대 박격포중대 이등상사로 춘천에 배치됐다. 전쟁 개시 당일 포진지를 구축하고 적을 맞아 싸웠지만 적 기계화부대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27일 소양교가 돌파되며 방어선이 붕괴되고 '서부전선 붕괴, 지연전을 펴며 철수하라'는 군 지휘부 지침에 따라 6사단은 3일 동안 버텼던 춘천을 빠져나와 홍천과의 경계점인 원창고개와 말고개에서 전열을 가다듬는다.
우리 무기는 M1 소총하고 칼빈, 수류탄뿐이었어. 중화기중대에도 박격포와 수랭식 기관총만 있었지. M1 소총도 미군들이 쓰고 남은 거라 한 발 쏘면 안 나가서 일일이 한 발씩 긁어서 쏴야 했어. 우린 맨주먹 맨몸으로 싸운 거야. 그땐 죽는 거 사는 거 생각할 틈이 없었어. 적을 죽여야 내가 사니까. 옆에서 동료가 쓰러져도 쳐다도 못 보고 앞만 보고 싸웠어. 그저 위생병! 위생병!만 부르며 총을 잡고 있었지. 말고개에 있으며 인민군 탱크가 오길래 포를 쐈는데 끄떡도 안 해. 직접 가서 파괴해야 한다며 특공대가 조직됐어. 그 특공대가 화염병과 수류탄 들고 맨몸으로 가서 탱크 6대를 부쉈지." -김상업
육탄으로 적 전차 등 파괴 후퇴 땐 분노 상관에 따져
국군은 지연전을 펼치며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선점하고 섬멸적 반격작전을 수행했다. 28일 말고개에서는 11명의 특공대가 10대의 적 자주포에 육탄 돌격해 파괴하는 대전과를 올리기도 한다. 6사단의 성공적인 후퇴 지연전에 북한군은 30일 저녁이 돼서야 홍천을 점령하게 된다. 19연대 1대대 1중대 소속 하사였던 이정상(87) 옹은 그래도 그 당시 후퇴 상황에 대해 아쉬운 마음이 크다.
우리 부대가 여수순천에서 토벌작전을 1년 동안 해서 전투에 능했어. 선생 아닌 선생이었지. 내가 기관총 사수였는데 야포 이런 거 다 필요 없고 기관총이 최고였어. 싸우지 못하고 계속 후퇴를 하는데 너무 화가 나서 나중에 상관에게 따지기도 했지. 더 버틸 수도 있었는데 그게 많이 아쉬워. -이정상
친한 전우 중 몇 명이 사망 올 때마다 그들 생각 ‘새록’
하지만 춘천전투를 기억하는 생존 용사는 이제 몇 명 남지 않았다. 당시 총탄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는 소양교 위에 선 김상혁(83, 2연대 3대대 11중대, 당시 하사) 옹은 “친했던 사람들 중에 여기서 죽은 사람이 몇 명 있는데 여기 올 때마다 그들 생각이 많이 난다"며 "우리가 싸운 이 춘천전투를 많이 기억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번 방문을 주관한 임관빈(예 육군중장·국방부 정책실장 역임) 육군협회 지상군연구소장은 "6·25를 맞아 당시 구국의 전투를 했던 참전용사 선배님들을 모시고 현장을 둘러보며 그날을 되돌아봤다"며
”선배들의 전통과 정신을 우리 모든 군 후배들이 계속 이어가길 바란다"고 전했다.
[인터뷰] 임관빈 연구소장이 본 김종오 장군의 항재전장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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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연구소장은 춘천지구전투를 '나라를 구한 전투'로, 이 전투를 수행한 6사단은 '나라를 구한 구국의 사단'이라고 평가한다. 그는 그 중심에 당시 6사단장이었던 김종오 장군(당시 대령)의 항재전장(恒在戰場) 리더십이 있다고 본다.
6사단장을 역임했던 임 연구소장은 "전군의 경계태세 해제에도 김종오 6사단장은 적 공격에 대비해 장병들의 외출 및 외박을 금지하고 작전회의를 소집하는 등 자체 경계조치를 강화했다"며 "이는 개전 초 서부지역이 안이하고 허술한 대비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는 치욕을 당한 것과는 달리 6사단만이 밀려나지 않았던 요인"이라고 말했다.
그는 "김종오 사단장의 위기의식과 항재전장정신에 따른 철저한 대비는 6사단의 성공적인 춘천방어로 이끌었다"며 그의 탁월한 리더십이 장병은 물론 춘천시민까지 일심동체로 만들어 적 공격에 맞설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진정한 리더는 부여된 책임을 완수하고 조직과 구성원의 미래를 위해 늘 깨어 있으며 위기의식을 가지고 철저히 준비하는 사람"이라며 "김종오 장군이 그러한 리더의 표본"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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