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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비무장지대>는 여전히 긴장감이 감도는 땅

이석종

입력 2013. 07. 25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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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60주년- 끝나지 않은 전쟁


  27일로 6·25전쟁의 총성이 멎은 지 60주년이 됐다. 6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지만, 그날의 상흔은 우리 마음속은 물론 주변 곳곳에 남아 많은 이들을 아프게 하고 있다. 특히 북한은 이날을 소위 ‘전승절’이라고 부르면서 자신들이 일으킨 엄청난 참화를 180도 다르게 제멋대로 해석한다. 이것도 모자라 최근 60주년을 맞아 최근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기념 훈장을 수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27일을 전후해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펼칠 것으로도 전해졌다. 하지만 북한이 이날을 ‘전승절’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다.

1953년 7월27일 판문점서 군사분계선·비무장지대 설정

6·25전쟁 상흔은 아직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

 

북한이 전쟁을 일으킨 건 한반도 전체를 공산화하겠다는 의도였지만 6·25전쟁을 통해 북한은 그 의도를 달성하지도 못한 채 많은 이들의 가슴에 상처만을 남겼다. 스스로 반성하고 사죄해도 모자랄 판에 ‘승전’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애써 자기 잘못을 모른 척 하는 꼴이다. 3년간의 전쟁과 그 후 60년이 지나도록 지워지지 않는 상처는 휴전선 155마일을 따라 고스란히 남아 있다.


▶긴장 속 MDL과 DMZ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서명된 정전협정의 1조에는 군사분계선(MDL)과 비무장지대(DMZ)에 관한 규정이 담겨 있다.

 협정에는 한 개의 군사분계선을 확정하고 쌍방이 이 선으로부터 각기 2㎞씩 후퇴함으로써 적대 군대 간에 한 개의 비무장지대를 설정한다고 규정했다. 이는 비무장지대를 설정해 이를 완충지대로 함으로써 적대행위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 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도 달렸다.

 쌍방 모두 비무장지대 내에서 또는 비무장지대로부터 비무장지대에 향해 어떠한 적대행위도 감행하지 못하도록 규정했고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의 집행에 관계되는 인원과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를 받고 들어가는 인원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군인이나 민간인도 비무장지대에 들어갈 수 없도록 했다. 더불어 민사행정 및 구제사업을 집행하기 위해 비무장지대에 들어갈 것을 허가받는 군인 또는 민간인의 인원수는 각방 사령관이 각각 이를 결정하지만 어느 일방이 허가한 인원의 총수는 언제나 1000명을 초과하지 못하도록 했다.

 이 외에도 민사행정, 경찰의 인원수 및 그가 휴대하는 무기는 군사정전위원회가 이를 정하도록 했고 기타 인원은 군사정전위원회의 특정한 허가 없이는 무기를 휴대하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이렇게 한반도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155마일을 따라 MDL과 DMZ가 설정된 지 6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이곳은 전쟁의 기운이 감도는 긴장감 넘치는 땅이다.

 경기 연천군 중면 중산리 비끼산 최고봉인 수리봉에 자리 잡고 있는 휴전선과 가장 가까운 전망대인 태풍전망대. 지금은 신청서만 쓰면 우리 국민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는 안보관광지가 됐지만 원래 이곳은 DMZ 안쪽에 있는 GP였다.

68년 북한이 휴전선 가까이 철책을 설치함에 따라 우리도 78년에 부분적으로 철책을 설치했고 이후 91년 12월 3일 현재의 전망대가 건립됐다. 휴전선까지 800m, 북한 초소까지는 1600m 떨어져 북한과 가장 가까운 전망대로 알려졌다.

 즉, 현재 태풍전망대와 북쪽 초소는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에서 삐죽 튀어나온 촉수처럼 DMZ 안에 자리 잡고 있는 형상이다.

이곳을 비롯한 DMZ 안에서는 그동안 여러 차례 실제 교전이 벌어졌다. 주로 60년대의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28사단 역시 사단 창설 이후 DMZ에서 북측과 17차례 교전했다. DMZ 수색 중 7회, DMZ 매복 중 7회, GP에서 3회 교전했다. 북한군 23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DMZ에는 여전히 전운이 감돌고 있다.


▶민간인 통제선 안쪽 마을들

 경기 지역 민간인통제선(민통선) 북쪽에는 대성동마을을 비롯해 파주 통일촌과 해마루촌, 연천 횡산리 등 마을 4개가 존재한다. 주민 대부분이 영농활동을 하는 농촌 마을로 민간인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주민은 최전방에서 영토를 지킨다는 자부심으로 불편한 생활을 감수하고 있다.

 특히 대성동마을은 유일하게 DMZ 안에 있다. MDL로부터 불과 400m 떨어져 있는 최북단 마을이다. 53년 7월 27일 정전협정 때 남북이 DMZ에 마을 한 곳씩 두기로 했고 일주일 뒤인 8월 3일 조성됐다. 같은 날 불과 800m 떨어진 북측 DMZ에는 기정동마을이 생겼다.

 초기 대성동마을에는 30가구 160여 명이 생활했다. 시간이 지나며 결혼·취학·이사 등으로 늘었다 줄기를 반복해 올해 6월 말 현재 56가구 213명이 살고 있다. 이곳 주민은 국방·납세 의무가 면제되고 각종 지원도 받고 있다. 유일한 교육기관인 대성초등학교 졸업식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군인들이 함께 축하하는 등 마을 축제로 열리고 있다. 그러나 집에 손님을 초대하기 까다로워 마을 밖으로 나가 만나고 남북관계가 경색될 때마다 불안에 떠는 등 불편을 겪고 있다.

 통일촌은 72년 민통선 북방지역 개발로 정착마을이 됐다. 행정구역상 파주시 군내면 백연리에 속하며 통일대교 북단에 있다. 현재 169가구 464명이 살아 민통선 마을 가운데 가장 인구가 많다. 콩을 지역특산물로 육성, 민통선 내 대표 관광지가 돼 매년 11월 임진각 광장에서 장단콩 축제를 연다.

 해마루촌은 임진강과 초평도의 아름다운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등 천혜의 환경으로 둘러싸여 있다. 6·25전쟁으로 고향을 잃고 떠돌던 실향민과 영농을 위해 먼 거리에서 출입하는 주민을 위해 조성됐다. 실향민 정착촌 계획에 따라 1998~2000년 조성, 2001년 처음 입주했다. 현재 69가구 171명이 살고 있다. 행정구역상 파주시 진동면 동파리며 DMZ 남방한계선으로부터 2㎞가량 떨어져 있다.

입주민들은 동파리(東坡里)에서 ‘동’을 ‘해’로, ‘파’는 언덕을 뜻하는 우리말 ‘마루’로 재해석해 마을이름을 해마루촌으로 지었다.

 연천 횡산리 마을은 임진강 최북단 마을이다. 70년대 식량증산정책에 따라 민통선 내 유휴농경지 개발을 위해 형성됐다. 남방한계선에서 3㎞가량 떨어져 있다. 초기 민통선 초소에서 검문을 받고 출입허가를 받아야 마을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태풍전망대 개방으로 최근에는 출입절차가 간소해졌다. 2010년 군남댐 건설로 마을 일부가 수몰돼 주민이 이주하기도 했다. 현재는 28가구 66명이 살고 있다.

 
▶분단 상징 다리 4개

 분단을 상징하는 다리가 판문점과 임진각 주변에 4개가 있다. ‘죽음의 다리’ ‘돌아오지 않는 다리’ ‘자유의 다리’ ‘독개다리’가 그것.

 죽음의 다리는 DMZ인 옛 경의선 장단역에서 남쪽으로 300여m 떨어져 있다. 경의선 철로를 가로지른다. 높이 8.0m, 길이 7.2m, 폭 5.5m다. 장단에서 연천 고랑포로 나가는 국도 연결 교량이었다. 그러나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간 미군이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던 중 이곳에 진을 치고 있다가 몰살당해 죽음의 다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서쪽을 흐르는 사천(砂川)에 놓인 다리로 MDL을 남북으로 가로지른다. 원래 널문다리로 불렸으나 53년 정전협정 뒤 이 다리에서 포로 교환이 이뤄지며 ‘한 번 건너면 돌아올 수 없다’는 뜻의 이름을 갖게 됐다. 68년 북한에 납치된 미국 푸에블로호 선원들이 이 다리로 돌아왔다. 76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발생 이후 유엔군사령부가 판문점 내 군사분계선을 구분 짓도록 요구, 북한이 새로운 다리를 놓으며 이 다리는 그저 쓰임새 없이 아픈 역사만 간직하고 있다.

 자유의 다리는 임진각 광장 망배단 뒤에 놓인 다리다. 6·25전쟁 포로 1만2773명이 이곳으로 돌아왔다. 당시 임진강 경의선 철교는 상·하행 2개의 다리가 있었으나 폭격으로 기둥만 남은 것을 전쟁 포로들이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서쪽 다리 기둥 위에 철교를 복구하고 그 남쪽 끝에 나무를 짜맞춰 임시 다리를 설치한 것이 바로 자유의 다리다.

 독개다리는 지금 경의선 열차를 타고 임진강을 넘어가는 철교다. 자유의 다리 바로 앞에 있다. 이 다리는 임진강의 남과 북을 잇는 유일한 다리다. 휴전 뒤 군인과 대성동마을 주민이 차를 타고 건넜으나 98년 6월 통일대교 개통 이후 사용되지 않다가 2000년 경의선 철교로 복구됐다. 


 

이석종 기자 < seokjong@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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