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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장관상 최우수] 그와 세 가지 호흡을 같이 하며

입력 2015. 07. 14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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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옥이 누구지?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독후감을 공모한다는 문서가 도착했는데 근본적으로 누구인지 모르겠다. 스마트폰을 켜고 김영옥을 검색하니 먼저 여자 탤런트가 가장 크게 뜨고, 그 아래 동명이인 중 한 명으로 웬 노인의 모습과 함께 ‘전 육군 1919’라고 뜬다. 이 사람인가? 탤런트보다 유명하지 않은 건지, 우리 사회가 공인이라고 하면 가장 먼저 연예인을 검색하는 취향을 인터넷이 반영해준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나하나 검색의 범위를 넓혀 가다 보니, MSN이 선정한 미국 역사상 최고의 전쟁영웅 명단이 있는데 그 16명 중 한 사람이 김영옥이란 사람이다. 한국인 이름이 맞는 것 같다. 독후감 공모 대회의 주인공이다. LA에 보내준다는 시상 내역은 이 사람이 누구기에 유적지까지 답사하는지 구미가 당긴다. 책 한 권 읽고 수년 만에 독후감이란 것을 써 보자는 생각이 든다. 워낙 잡식으로 책을 읽으니 한 권 추가하는 것에 대한 부담은 없어서 편하게 책 한 권 읽어 보자는 심산으로 책을 구매했다. 역시 표지에 인터넷에서 보았던 그 어르신의 사진이 있다. 책 제목을 보고 샀지만 맞게 책을 산 것 같다. 책이 도착하면 그 책이 무엇을 내게 줄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책장에 전시될 책 한 권이 늘었다는 마음에 일단 반가운 것이 형식적인 장서가인 듯하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뭔가 다르다는 생각과 함께 마음이 무거워진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읽으면서 차분함과는 조금 다른 가라앉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나는 대체 무엇이냐는 반문을 자꾸 하게 된다.


 이 책은 고(故) 김영옥 예비역 미 육군대령이 한국인으로서 미국 사회에서, 어떤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인생에서 던져진 전쟁에 승리해 나갔는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속에서 한국계 미군 장교로서 어떻게 전투를 수행해 나갔는지를 사실적으로 다루고, 한 인간으로서 생의 전쟁을 수행함에 어떻게 아픔을 삼켜 나갔을지 추측하게 한다. 그렇게 세 가지의 호흡을 같이하면서 전투의 아비규환과 인종차별의 시대적 착오 속에 살아보지 못했지만, 선배 장교 이상으로 한 위인의 생을 느껴본다.


 “전쟁이 벌어졌는데 후방을 택하는 장교의 장래는 뻔한 것 아닙니까. 솔직히 말해 어차피 직업군인으로 장교가 된 바에야 소령으로 끝나고 싶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저는 유색인종입니다. 그런 식으로 군대 생활을 한다면 운이 좋아야 중령도 되기 어려울 겁니다.”


 싱글스 대령이 한국전 참전을 원하는 영옥을 만류할 때 그는 자기의 각오를 이렇게 말했다. 직업군인으로서 전방을 원하는 전투적 의지는 모르겠다. 난 여기서 유색인종이라는 그의 말에 많은 의미를 둔다. 나는 2009년에 운이 좋아 미국으로 범죄수사관 양성과정 교육을 받으러 간 적이 있다. 주한미군 출신도 많아서 김치와 박카스 등으로 대화를 시작할 거리도 많고,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를 위시한 한국의 기업들 그리고 이미 십수 년 동안 선배 한국군 장교들이 그들에게 보여준 능력 덕분에 한국인으로서 무언가에 의한 차별을 받았다는 느낌이 든 적은 없다. 다만, 내 주변에 유색인종 미군 친구들이 많았는데, 그중 나이 많은 흑인 군무원으로 CID 교육 들어온 친구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 레스토랑에는 흑인이 들어올 수 없었고, 백인과 한 자동차 안에 같이 탈 수 없었다는 등의 경험담을 말해 줬던 것이 기억난다.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으로 선출된 지 수년이 지난 지금에야 많이 개선되었겠지만 수십 년 전 사회상으로 추측해 보면 김영옥 대령이 군 생활을 하는 동안 미국의 국익을 위하는 미군 장교로 근무하면서 유색인종이기에 제때 진급을 계속 못 하기도 하고, 스스로 유색인종이기에 극복해야 할 것이 더 많은 그런 현실이 늘 쉽게 여겨지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는 학사장교 출신이다. 유색인종에 추가해서 군 출신에 또 다른 영향을 미치는 것이 있다. 4년을 군사학교에 다니고 임관했느냐와 90-day wonder의 기적으로 임관했느냐는 그가 극복해야 할 여러 가지 중 하나였다. 나는 평화가 50여 년 지속된 나라의 학사장교로 임관하게 되다 보니 그보다는 그래도 좀 더 긴 훈련기간을 거쳐 임관했다. 나는 180-day wonder의 기적이라고 해야 하나? 어릴 때 위인전을 읽으면 그 위인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나이 들어 위인전을 읽으면 공통점을 찾아 나도 위인이 될 수 있다는 의인화에 충실해지는 경향이 있는데 내가 나이가 들긴 든 모양이다. 겨우 찾아낸 그와 나의 공통점이 비사관 출신밖에 없다. 그리고 그보다 더 긴 기간 훈련을 받았다고 더 나은 여건이라고 착각도 해본다. 영웅의 얘기를 자기화해서 무언가 자극을 받고자 함이니 욕할 사람은 없으리라.


 장교로서의 생활을 일본계 2세로 구성된 100대대에서 시작하게 된다. 일본계 2세로 구성된 부대에 한국계 2세 장교가 가는 대목에서, 미국에서 유색인종은 이런 식으로 일부러 고생시키려고 하나 하는 착각마저 들었다. 더 읽어 나가면서 백인이 봤을 때 일본계나 한국계나 찢어진 눈은 똑같이 보여 일본인으로 착각했다는 부분을 찾아 잠시의 오해는 풀었다. 100대대원은 미국의 국익을 위해 싸우면서, 유색인종이자 미국을 상대로 선전포고도 없이 전쟁을 일으킨 일본계라는 의심과도 싸워야 했다. 그리고 slanted eyes를 같이 가지고 있는 영옥은 일본인이 지배하고 있던 한국인이라는 편견 속에서 추가적인 전쟁을 겪어야 했다. 일 많은 것보다 사람 잘못 만나는 것이 더 고생이라는데, 전투에 임해야 하는데 사람마저 잘못 만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그는 2차 대전에 참전해 고지를 점령해 나가는 각각의 전투에서 승리를 기록해 나가고, 그 승전보의 누적은 Horse Trading이라고 빗대어지는 인사교류에서 백인 소령 두 명과 유색인종 대위인 영옥을 교환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한다. 결국, 그는 포탄이 날아드는 전투와 인종·출신 등의 편견이라는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리고 전투라는 생과 사의 갈림에서 피부색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 되어 살아남는 것이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입증한다. 또 하나, 유색인종 중에서도 일본인의 지배를 받는 한국인으로서의 전쟁에서도 승리한다.


 수많은 고지전과 전투 속에서의 결론은 그렇다. 그러나 과정은 어떤가?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는 대한제국이란 없어진 나라에서 도망쳐 나온 독립투사의 아들이다. 한국인이고, 외국인이 봤을 때는 거기서 거기라는 표현 그대로 별 차이 없는 그냥 일본인이고, 일본인으로 구성된 부대의 장교로 보임된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의심과 편견이라는 표현을 썼지만, 일본인의 지배를 받던 당시의 한국인으로서 일본인을 지휘해야 하는 장교가 되었는데 그게 안 보일 리가 있는가? 그럼에도 그가 눌려 있던 인종차별, 편견 등에 대해 능력과 부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극복해 나가는 대목에서는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예수님이나 부처님의 사람 사랑기를 읽는 것 같다. 쉽지 않았을 여정의 결과다.


 “Speaking of horses, did you ever see those Lipizzaner stallions from Portugal. The most highly trained horses in the world. They’re all white.”


 “They’re not from Portugal, they’re from Spain. And at birth, they’re no white, they’re black.”


 ‘크림슨 타이드’라는 영화에 나오는 대사다. 핵잠수함의 백인 함장이 흑인 부함장과의 갈등 끝에 최고의 종마가 있는데 모두 흰색이라고 하며 백인 우월주의를 은근히 내세우고, 흑인 부함장이 그 말은 태어날 때는 흑색이라고 사실에 근거해 받아치는 부분이다. 핵잠수함과 관련된 작전 판단을 하는 것, 그리고 근본적으로 직무능력과 리더십이라는 것은 색의 구분에 의하지 않는다는 흑인 부함장의 강한 정신은 예비역 한국인 미 대령 김영옥이 화약 냄새와 시체 썩는 냄새가 나는 전투에서, 인종차별 등과 고투한 인생의 전쟁 속에서 버텨낸 정신과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정말 그에게 미안하지만, 그가 돌파했던 시절이 아닌 지금을 살아가는 나는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조심스럽게 든다.


 “반드시 성공적으로 교육과정을 마치리라. 만에 하나 졸업을 못 해도 내가 최선을 다하지 않아 그렇게 되는 일만은 결코 없을 것이다.” OCS 과정 입과 전 영옥은 그렇게 다짐을 한다. “나는 남는다. 그러나 오로지 남기 위해 다른 장교나 사병들에게 비굴하진 않겠다.” 영옥이 일본계 미국인으로 구성되고 파병을 준비 중인 100대대에 잔류를 희망하며 그렇게 의지를 확인한다. 나는 장교가 되기 전 무엇을 다짐했던가? 장교 시험을 치기 전 몇 달간 불상 앞에서 홀로 촛불을 켜놓고 맹세했던 세 가지가 있다. 맑은 우물이 되어 여러 사람에게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게 해 주겠다. 득이 없어도 수고로운 삶을 살겠다. 마지막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장교가 되게 해주면 지키겠다고 했던 맹세를 잘 지키고 있는지도 의문인데 마지막 맹세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하는 것만이라도 난 잘 지켜내고 있는가? 아닌 것 같다. 작년에도 전투비행단 기지작전과장을 하면서 늦은 밤 퇴근을 하며 법당에 들러 수고로워도 너무 수고롭기만 한 거 아니냐고, 인제 그만 수고로웠으면 한다고 반개하고 있는 불상 앞에서 투덜거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내 카톡의 주제어는 “이 또한 지나가리”다. 솔로몬의 지혜를 숭상한다고 말하고 싶지만, 나에겐 그저 이 힘든 시기가 제발 지나가라는 의미다. 이런 현실 속에서 이 책을 읽으니 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일까? 마치 김영옥 선배님이 나에게 묻는 것 같다. “이탈리아 볼투르노강 전투, 독일군 방어선을 침투하여 포로를 생포해 온 일, 한국전에서 전선을 북상시킨 결과를 가져왔던 각종 고지전들 속에서 내가 수행한 전투와 나의 고단함에 비해 너의 수고로움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냐?” 가슴을 후벼 파는 질문이란 것이 이런 것일까? 마땅히 변명할 것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김영옥 미 예비역 대령은 2차 대전에서도, 한국전에서도 병사들과 함께하고 전투에 임함에 늘 부하들과 생사를 함께했다. 그래서 프렌치 리비에라에서 실질적인 사령관의 임무를 수행하면서 “모든 장교는 병사들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병사들은 자기와 함께 고통을 나누지 않는 장교의 말을 듣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나?”라고 모처럼의 총소리가 나지 않는 전선에서 마음이 풀어져 전장을 순찰해본 적이 없는 중대장들에게 호통을 칠 수가 있었다. 한국전에서는 오전 중에 작전을 끝내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는 사상자를 적게 하여 신병을 받을 필요가 없게 하고 그래서 병사의 휴식을 보장함과 동시에 전투경험이 많은 인원을 더 보유할 수 있다는 전투력 유지 측면에서 훌륭한 작전지휘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김영옥이 미 육군 최초로 1개 분대가 사격하는 동안 2·3분대가 이동하고, 2분대가 사격하는 동안 1·3분대가 이동하는 훈련을 하는데, 당연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가 요즘 당연히 훈련하는 방식 중 하나가 그분이 시작한 것이구나 하는 유래에 대해 인지해 본다. 부하를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있었기에 전투의 효과성을 더 고민하게 하고 자신의 부하를 더 많이 생존케 하는 결과로 이어졌다고 본다.


 베트남전 당시 미군에 할 무어 중령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갑자기 베트남전의 인물을 꺼내 미안하지만, 김영옥의 정신을 대변해줄 말이 있다. 실제 연설문이기도 하다.

 

 “When we go into battle I will be the first to set foot on the field and I will be the last to set off. And I will leave no one behind. Dead or alive we will all come home together.”

 

   가장 먼저 전투에 임하고 전투에서 가장 나중에 철수할 것이며, 부하들을 남겨 놓고 내가 먼저 전투에서 철수하지 않을 것이다. 죽어서든 살아서든 함께 집으로 돌아오자는 말이다. 이 짧은 세 문장이 김영옥의 장교로서의 리더십과 솔선수범 등 각종 표현을 대신해줄 수 있지 않을까? 장교면 당연한 거 아니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장교들은 알 것이다. 할 무어 중령의 표현에서 묻어 나오는 것이든, 김영옥의 일대기를 그린 책에서 말하는 것이든 흉내 내기가 상당히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김영옥 예비역 대령이 얘기하는 장교로서의 핵심은 일체감인데, 나 역시 소대장·중대장 시절에는 할 무어 중령이나 김영옥 대령과 같이 생활했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그러나 살아온 배경과 생각 그리고 직업군인과 의무복무 병사의 내심이 다른데 그런 복잡한 요소들을 극복하고 일체감을 유지하기 위함이 말처럼 쉽진 않더라. 때론 호랑이처럼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론 돌부처처럼 들어주기만 했기도 한데, 지금에 와서 당시의 일기장을 보니 전투 중에 소대장을 한 것이 아닌데도 부하들과 일체감을 유지하면서 함께한다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만은 아니었으며 부단한 자기희생과 노력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다시 든다.


 책을 여러 번 읽다 보니 ‘타고난 장교’라는 부제가 눈에 거슬린다. 난 동의할 수 없다. 타고난다는 것은 없다고 본다. 그리고 그런 일대기를 남겨 주고 간 선배 군인이 타고난 부분이 있어 이렇게 그가 태어난 지 백 년이 지난 지금 후대의 후배 장교가 그의 기록을 읽어 나가게 되었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모든 이는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릴 적 부모님의 교육, 그리고 살아오면서 형성된 자신만의 관심과 그에 대한 충족 등이 하나의 특성화된 인격이나 자질을 만들어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가 지도를 보면 마치 현장에서 본 듯 입체적으로 현장의 지형이 떠오르는 것도, 이탈리아 치우사노로 향하던 서전에서 경험한 탱크와 포탄 속에서 경험한 차분함도 결국 그의 생애 동안 단련되어 온 것의 발현이지 않을까?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그래야 한국의 후배 장교들이 타고난 것이 있다고 생각하든 그러지 않든 한 명의 우수한 장교로 성장해 나가기 위해 불철주야 공부하고 훈련에 임할 수 있으리라.


 “언제나 어떤 일을 할 때는 자기는 일을 하고 뒷자리로 물러앉아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그 일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자부심을 갖고 자랑하게 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는 병사들의 공적이 묻히는 일이 없도록 별도로 담당 기자 병사를 선정하여 연대 신문에 대대원에 대해 홍보도 하고 인사기록을 남겨 부하들의 공이 근거화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한국전쟁 고아들을 위한 경천애인사 지원, 한인건강정보센터 설립·육성 등 재미 한인사회를 위한 노력, 일본인 2차 대전 참전 기념비 설립 추진 등 재미일본인사회를 위한 봉사, 아시아·태평양계 가정폭력 피해여성보호소 발전, 일본인 위안부 문제 관련 법률안 통과에 기여하는 등 휴머니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정이 넘치는 한국인 혈통의 계승자이고 기부 및 기여 정신이 깃든 미국인으로 살아오면서, 그리고 일본인으로 편성된 100대대의 장교로서 그의 인생이 사회적 약자 보호와 민족을 넘어서는 봉사정신으로 이어지게 한 것 같다. 그 많은 스스로의 노력에도 그가 나서 떠든 것은 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자부심을 충만하게 해 주었다. 나는 과연 그럴 수 있는가 하는 자문에 확신에 찬 대답을 하기 어렵다. 결국 그가 보여주는 겸손함은 다른 사람의 자부심으로 이어진 것이다. 정 겸손함을 못 배울 것 같으면 내가 잘했니 못했니 하면서 티격태격할 것이 아니라 불가의 묵언 수행이라도 해서 따라 해 볼 일이다.


 이 책은 560페이지에 달한다. 중간에 사진 몇 장을 빼더라도 500페이지에 달하는, 결코 얇은 책이 아니다. 그만큼 한 영웅의 생을 핵심 위주로 정리하는 것에 무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부인 아이다의 얘기는 아주 간략히 몇 페이지밖에 할애되지 않는다. 폭격기를 얻어 타고 위독한 아내를 만나러 간 얘기, 어떻게 만나게 되어 결혼하게 되었는지는 총 560페이지의 방대한 서술 속에서 몇 페이지밖에 없다. 어차피 연애 소설을 읽고자 함이 아니었기에 큰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고아원 지원을 어떻게 했는지 구체적으로 나와 있는데 자녀를 어떻게 키웠는지는 언급이 없다. 평시의 나와 전시의 그 생활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적이지만 유사하게라도 접근해 본다면, 두 개 비행단의 기지작전과장을 총 4년간 하면서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도발, G20 경호행사, 각종 검열과 훈련 준비 등 역사의 굵직한 사안들을 겪고 기본 임무들을 수행하다 보니 가족은 늘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무능하니까 일을 빨리 못 끝내고 질질 끌면서 가족과의 시간을 많이 확보하지 못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떤 변명을 하든 간에 작전과장의 임무 등 업무에 집중하다 보니 가족은 어쩔 수 없이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최초의 2차 대전 참전 유색인종 부부의 생에 대한 얘기가 별로 실려 있지 않음에 대해 고개가 끄덕여진다.


 주말 동안 세 번의 호흡을 예비역 김영옥 대령과 함께하고 나니 형광등 불빛이 꺼진 듯 햇살이 커튼을 비집고 들어온다. 이제 약복이라고 부르는 근무복을 입고 출근해야 할 시간이다. 현관 앞 거울을 통해 내 어깨에 달린 소령 계급장을 다시 보게 된다. 군복에 달린 계급장의 위치나 모양은 어제와 같다. 다만, 세 번의 세 가지 호흡을 같이하며 김영옥의 소령 계급장에 실린 무게를 감히 가늠해 보게 되니 나의 소령 계급장에 녹아들어 있는 무게가 다르게 느껴진다. 그리고 세 아이에게 오늘도 멋지게 살자고 힘주어 말하고 현관문을 나선다. 그리고 물어본다. 나는 두 아들에게 아빠의 어떤 이야기가 담긴 책을 남겨 주게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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