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산책 <71>포기해선 안 되는 소중한 자산 ‘신의’
춘추시대 오나라 계찰의 일화 보검 주기로 다짐 후 상대 죽자 무덤까지 찾아가 두고 온 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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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자공이 공자에게 정치의 요점을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족식(足食), 족병(足兵), 민신(民信)’이라고 답했다. 지금 식으로 풀이하자면 탄탄한 경제력, 튼튼한 국방력, 그리고 국민의 높은 신뢰도가 바로 그것이다.
자공이 다시 물었다. “이 셋 중에서 부득불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무엇을 버려야 합니까?” 공자는 ‘병’을 버리라고 했다. “다시 양식과 신뢰 가운데 부득불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요?” 공자는 말했다. “당연히 양식을 버리고 신뢰를 남겨야 한다. 백성의 신뢰가 없다면 그 나라는 한순간도 존립할 수 없는 것이다.” 신뢰, 신의야말로 어떤 상황에서도 최후까지 양보할 수 없는 가장 값진 가치요 덕목이라는 말이다.
춘추시대 오나라 왕(吳王) 수몽(壽夢)에게는 장자 제번(諸樊), 차남 여제(餘祭), 삼남 여매(餘昧), 막내 계찰(季札) 이렇게 네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 네 명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막내 계찰이었다. 왕은 이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계찰이 끝내 사양하는 터라 어쩔 수 없이 장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선친의 의중을 알고 있는 장자 제번은 왕이 된 뒤 둘째, 셋째 동생과 상의해 왕위를 형제가 계승하기로 했다. 마지막 왕위를 계찰에게 물려주기 위한 방편이었던 것이다. 세 명의 형제는 차례로 오나라 왕이 됐고, 계찰은 충심을 다해 그들을 도왔다. 후에 셋째 형 여매가 임종을 맞아 계찰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으나 계찰은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말했다.
“저는 사람 노릇이나 반듯하게 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부귀영화는 저에게 귓가를 스쳐가는 가을바람과 같을 뿐이니(秋風過耳)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계찰은 경성을 떠나 숨어버렸고 후에 여매의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 후에 다시 출사해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한다.
이 계찰이 오왕의 명을 받아 진(晉)나라로 사신 갔을 때의 일이다. 도중에 서국(徐國)이라는 나라에 들러 임금인 서군(徐君)을 만났는데, 검을 애호했던 서군은 계찰이 차고 있던 보검을 몹시 부러워했다. 계찰은 그의 마음을 알고는 돌아오는 길에 반드시 선물하리라 마음먹었다. 사신의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후에 서국에 들렀더니 아뿔싸, 서군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계찰은 그의 무덤을 찾아 보검을 풀어 무덤가 나무에 걸어두고 오나라로 돌아간다.
그를 수행하던 신하가 물었다. “서군은 이미 죽었거늘 이렇게 하는 것은 오나라의 보물인 보검을 버리는 것이 아닙니까?”
계찰이 단호하게 말했다. “처음 서군이 내 검을 부러워하였을 때 나는 이미 선물하기로 내 스스로와 약속했다. 다만 대국에 사신을 가는 길이었기에 잠시 뒤로 미룬 것일 뿐이다. 이제 서군이 죽어 상황이 바뀌었다고 내 스스로 한 약속까지 바꿀 수야 있겠는가!”
서나라 사람들은 계찰의 모습에 감동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오나라 왕자 계찰이여 / 죽은 사람과의 약속도 잊지 않았다네 / 천금의 보검을 풀어서는 / 무덤가에 걸어두었다네!”
이 ‘계찰이 검을 나무에 걸었다’는 뜻의 ‘계찰괘검’의 고사는 남들과의 약속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과 내면으로 한 약속까지도 철저히 지키려 했던, 신의의 최상급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성곤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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