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꺅” 외마디 소리에 가까운 환호성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가 곳곳에서 번쩍거렸다. 환한 조명을 받으며 출연자가 등장하자 1300여 개의 객석은 물론 뒷편과 계단까지 관객들로 가득찬 공연장은 열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이 정도면 유명 가수 순회공연이 아닐까 짐작하겠지만 실은 지난 11일 목포 시민문화체육센터 대공연장에서 열린 ‘해군 군악대와 수병 이루마의 신년 음악회’의 한 장면이다.
공연의 문은 해군목포해역방어사령부 군악대가 활짝 열었다.흥겨운 연주로 한껏 고조된 분위기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이루마 일병의 등장과 함께 최고조에 달했다.
대한민국 해군 수병답게 무대에 서자마자 “필승” 경례부터 한 이일병은 연주 중간중간 곡에 대한 설명을 곁들여가며 부드럽게 연주회를 이끌어 갔다. 여성 관객들의 한숨에 가까운 환호 속에 이일병의 독주와 현악 4중주가 마무리됐지만 그렇다고 분위기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다. 전군 최초의 마술병인 전창우 병장의 마술 공연이 금세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타오르던 지팡이가 스카프가 되고 곳곳에서 새하얀 비둘기가 나타나는, TV에서나 봤던 마술이 눈 앞에서 펼쳐지자 절로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어진 해군 빅밴드의 연주는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뚫어 줬고 폭발적인 가창력을 자랑하는 가수 김남호 병장·안찬섭 상병·이상욱 일병의 노래는 공연의 대미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공연 시작부터 몸을 내던지는 진행으로 웃음을 유도한 MC 정진욱 병장·이희승 상병이 끝까지 흥을 북돋우면서 목포를 떠들썩하게 했던 공연은 깊어가는 겨울밤과 함께 막을 내렸다.
이날 군악대와 함께 공연을 선보인 팀은 바로 해군홍보단. 부대는 물론 전국 곳곳에서 공연을 펼쳐 장병들의 사기를 높이고 친근한 해군상을 심는 홍보단은 지난해 영국 시민권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진 입대한 이루마 일병이 합류하면서 가는 곳마다 관객몰이를 하며 더욱 주가를 올리고 있다. 하지만 홍보단의 인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69년 9월 5일 낙도홍보단 혹은 낙도봉사단이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홍보단은 연예병사제를 운영하는 국방부를 제외하면 현재 전군에서 유일하게 운영되는 종합 엔터테인먼트 조직. 가수·MC·사물놀이·밴드·마술병 외에도 디자인·VTR편집·만화병까지 홍보단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홍보단이 40여 년 세월 동안 전통을 이어 오고 있는 것은 해군의 활동무대가 바다이기 때문이다.
홍보단이 창설되던 때만 해도 한반도 인근 해역에는 ‘낙도’가 흔했다. 교통·통신 인프라가 열악해 고립무원 상태에 놓인 낙도는 북한 공작원들의 활동무대가 되기에 적격이었다. 베트남전쟁을 통해 지역 주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궁극적 승리의 비결임을 깨달은 해군은 낙도 주민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홍보단을 창설했다.
못 먹고 못 배우고 평생 병원 문턱도 넘지 못하는 낙도주민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홍보단은 홍보반과 진료반·위문공연반으로 구성됐다. 진료·방역·가전제품 수리·이발을 해 주고 일손을 도우며 위문품을 전달했다. 이 때문에 이들이 낙도에 도착하면 주민들이 몰려들어 섬은 하루 종일 잔치마당이 됐다.
2000년대 들어 경제 수준이 높아지면서 낙도 개념이 희미해지자 낙도홍보단은 2003년 해군홍보단으로 이름을 바꾸고 위문공연반 위주로 조직을 정비해 변신을 시도했다. 낙도봉사의 연장선상에서 어려운 이웃을 방문, 우리 이웃의 벗이 되고 문화적으로 소외된 지역을 찾아 멋진 공연을 보여줌으로써 민·군 화합의 첨병이 되겠다는 것이다.
해외 공연활동도 홍보단의 빼놓을 수 없는 임무다. 매년 해군 순항훈련함대에 동승, 우리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문화대사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독특한 임무를 수행하다 보니 연예 특기를 가진 이들에게 홍보단은 예전부터 중요한 활동무대로 자리 매김 했다. 홍보단을 거쳐간 연예인의 면면도 화려하다. 가수 김건모·유희열을 비롯해 김종진(봄·여름·가을·겨울), 안정엽(브라운 아이드 소울)과 MC 김승현, 개그맨 김용만·지석진·장용·김종국·심현섭 등이 그들.
‘웃음을 찾는 사람들’ 등에서 활동하다 입대, MC를 맡고 있는 정진욱 병장은 “연예활동하는 선후배들 사이에 홍보단 입대 경쟁이 치열하다”며 “홍보단에 들어오기 위해 재수·삼수를 각오하고 몇 달간 준비했고 군에 와 100여 회 무대에 서면서 공연에 대한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루마 일병·작곡가 겸 피아니스트-“피아노 선율에 장병 노곤함 씻겨졌으면…”
최근 해군홍보단 공연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이루마(29·사진) 일병의 연주. 홍보단의 공연이 지방 중소도시나 격오지에서 주로 이뤄지는 만큼 평소 유명 연예인들을 직접 대하기 어려운 주민들에게 이루마의 출연은 화제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가는 곳마다 카메라 플래시 세례에 사인공세까지 이어져 과연 그가 현역 군인인가 의심스러울 정도. 까만 해군 수병 정복이 어떤 옷보다 잘 어울리는 이일병은 그런 관심에 감사하면서도 적잖이 부담스러운듯 “선임들도 많이 있는데…”라며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입대한 지도 6개월이 됐고 일병 계급장도 달았습니다. 하지만 그런 변화보다 공연하면서 차곡차곡 쌓아가는 보람이 더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입대하고 처음 했던 어청도 공연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사실 홍보단 일원이 아니라면 찾아가지 않았을테고 앞으로 가지도 않을 외딴 섬인데 거기 계신 분들에게 처음으로 제 음악을 들려 드린다는 사실이 정말 뿌듯했어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이 연주할 곡에 대한 설명과 떠오르는 단상을 말하는 공연 방식은 바뀌지 않았지만 입대하고부터 말하는 내용에는 변화가 찾아왔다.
“우리 자신이 소중하다는 얘기를 많이 해요. 자신이나 자신이 처한 상황에 불만을 갖고 있다면 제 연주를 들으면서 자신보다 힘든 사람을 생각해보라고요. 외부 공연에서는 이런 형식의 얘기를 안 했는데 저 역시 군인이 되고 보니 그런 생각이 마음이 와 닿더군요. 때로는 열악한 상황에서 공연해야 할 때도 많지만 제 음악이 열심히 복무 중인 선후임과 국민들에게 작지만 깊이 있는 위로가 되기를 바라면서 군 복무를 마치는 그날까지 열심히 공연에 임할 생각입니다.”
글=김가영·사진=정의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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