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민주·애국의 길을 걷다
대구, 경북 구미·칠곡-영웅의 혼 흐르는 낙동강
6·25전쟁 당시 ‘방어선 사수’ 최후의 보루
위기 속 55일 사투의 흔적 고스란히
무명바지 차림 보급품 나른 지게부대 위령비
왜관철교 앞 영면 미 육군 부부 조형물
풍전등화 대한민국 지킨 건 결국 ‘우리’
“백선엽 장군은 다부동전투의 승리는 지게부대원의 고귀한 희생과 숭고한 헌신이 스며 있다고 하시며 항상 고마워하셨고, 전쟁이 빚어 내는 비극에 늘 가슴 아파하셨습니다. (중략) 이름 없는 영웅들이여, 편히 잠드소서. 2023년 7월 5일 백선엽 장군의 유지를 받들어 맏딸 백남희가 올립니다.” (경북 칠곡군 다부동전적기념관에 세워진 지게부대 위령비)
벼랑 끝 위기 속에서 버텨 낸 55일. 최후의 보루인 낙동강을 둘러싼 처절한 사투는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 국면이었다. 14만1000여 명(국군·유엔군) 대 9만8000여 명(북한군). 영덕에서 마산에 이르는 긴 전선을 사이에 두고 대규모 전력이 정면충돌한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대한민국이 처음 맞은 현대적 개념의 총력전이었다. 낙동강 전선에는 군인만 서 있었던 게 아니다. 솜털이 보송한 학생부터 치안을 책임지던 경찰, 심지어 무엇이든 돕겠다며 나선 노무자들까지 모든 국민이 낙동강변 앞에 섰다. 백선엽 장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월턴 워커 장군 등으로 대표되는 전쟁영웅들의 활약 뒤에는 무명 호국영웅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중심지였던 대구시, 경북 구미시·칠곡군에는 이들을 기리기 위한 여러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글=맹수열/사진=한재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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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승전기념관에서 만난 학도병
대구시 남구 앞산공원 초입에 세워진 낙동강승전기념관은 자연을 즐기러 온 이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호국 명소’다.
기념관 안에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경과를 상세히 살펴볼 수 있는 각종 전시물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기념관은 학도의용군의 활약을 조명하고 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는 학도의용군의 활약이 가장 눈부셨다. 직접 총을 들고 참전한 학도의용군만 2만2000여 명, 후방지원·선무활동에 나선 이들까지 합치면 20만 명을 훌쩍 넘는다. 이들은 포항전투, 기계·안강전투, 영천전투, 다부동전투, 현풍지구전투, 진동·마산전투 등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해 벌어진 각종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싸웠다. 심지어 여학생들까지 간호원으로 참전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기념관 2층에 마련된 추모관에는 땅, 하늘, 바다에서 조국을 지키다가 숨진 영웅들의 이름과 사진이 빼곡히 자리 잡고 있었다. 이와 별도로 외부에는 학도의용군 추모비를 건립해 무명의 용사들을 기리고 있었다. 풍전등화의 위기에도 대한민국을 지킨 건 결국 ‘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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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대신 지게를 진 이들…다부동에서 만난 지게부대
대구를 벗어나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핵심으로 꼽히는 다부동전투 현장, 칠곡군으로 향했다. 도로를 따라 펼쳐진 험준한 산세는 우리 군이 왜 이곳을 최후의 보루로 꼽았는지를 여실히 보여 줬다.
이 험로를 따라 펼쳐진 전투 속에는 알려지지 않은 이들도 즐비했다. 칠곡군 가산면 다부동전적기념관에는 이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기 위한 시설이 함께 마련돼 있다.
기념관 입구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다부동전투 영웅 백선엽 장군의 대형 동상. 기념관으로 향하면 또 다른 시설물들을 만나 볼 수 있다. 구국경찰충혼비가 대표적이다.
북한군의 위협이 대구까지 미치자 낙동강으로 향한 경찰 수는 무려 1만5000여 명. 기록된 전사자는 197명이지만 더 많은 이가 장렬히 산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찰은 대구로 침투하는 게릴라에 맞서 치안을 강화함으로써 후방지역 안정에 큰 공을 세웠다.
“보통 군인들이 많이 죽은 것으로 기억하잖아요? 전시를 보기 전 경찰충혼비가 있어 설명을 읽어 보니 조금 놀라웠어요. 전쟁 때 경찰도 많이 희생됐다는 건 처음 알았어요. 정말 ‘너나없이 싸웠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기념관에서 만난 조영옥 씨는 전쟁 당시 경찰의 헌신을 알게 돼 마음이 숙연해졌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곳에서는 지게부대원들을 위한 위령비가 눈길을 끌었다. 공식 명칭은 한국노무단(KSC). 지게를 지고 전장을 누비는 모습 때문에 지게부대로 더 널리 불렸다.
이들은 전선부대에 탄약, 연료, 자재, 식량, 식수 등을 보급했다. 지게부대는 45㎏이 넘는 보급품을 둘러메고 6㎞나 떨어진 고지를 매일 오갔다. 철모는커녕 군복도 없이 무명바지 차림으로 총탄을 뚫고 보급로를 오르던 이들의 용기는 장병들에게 큰 힘이 됐다고 한다. 실제로 당시 국군과 유엔군의 전투지휘관들은 “전투의 절반을 그들이 치렀다”고 입을 모았다. 보급만 한 게 아니었다. 지게부대는 전상자 후송, 도로·교량 보수 등 전쟁에 필요한 모든 활동에 참여했다. 심지어 급박한 상황엔 총을 들고 전투에 참전하기도 했다.
이들의 보이지 않는 숭고한 희생은 최근 들어 조명받고 있다. 2023년 7월 백선엽 장군의 딸 백남희 씨는 이곳에 건립된 위령비 속 추모글에서 아버지의 간곡한 유지에 따라 ‘호국의 성지’인 다부동에 지게부대 위령비를 세워 그들의 애국심을 기리게 됐다고 설명했다.
‘55일간의 혈전’ 한눈에…칠곡호국평화기념관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언덕에 세워진 칠곡호국평화기념관은 5층 규모의 웅장함을 자랑한다. 미래 세대가 6·25전쟁과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기억하고 호국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마련한 것이 특징이다.
지하 1층 중앙홀 앞에는 어린이들이 참여한 호국미술 전시를 하고 있었다. 아직 서툰 붓질이었지만, 그 안에는 전쟁의 위험성과 평화의 소중함에 대한 나름의 생각이 잘 정리돼 있었다. 같은 층에는 시뮬레이션으로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체험해 볼 수 있는 전투체험관과 아이들이 뛰어놀며 평화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는 유아평화체험관도 있다. 1층에도 다양한 만들기 체험을 하며 호국의 의미를 되새겨 볼 수 있는 어린이체험실이 자리하고 있다.
본격적인 전시를 볼 수 있는 1층 호국전시실에는 전쟁 당시의 무기, 군수품, 무공훈장 등 다양한 전시물이 마련돼 있다. 특히 55일간의 혈전을 국면별로 살펴볼 수 있도록 구성해 관람객의 이해를 도왔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전사자 유해발굴을 독려하기 위해 별도의 전시관을 꾸민 것.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의 실제 모델인 최승갑 참전용사의 유해가 발견된 곳이 바로 칠곡군 포남리 369고지였다. 유해발굴 전시관은 다부동 일대에서 발굴되는 수많은 유해가 가족 품으로 돌아가도록 돕기 위해 마련된 특별한 공간이었다.
승리의 마중물…비산나루터와 왜관철교
구미시 비산나루터는 1950년 8월 5~6일 국군 1사단 15연대 5중대 장병들이 북한군 13사단 예하 1개 대대를 상대로 혈전을 벌였던 곳이다. 비산나루터는 유속이 느리고 수심이 얕아 도하가 유리한 요충지였다. 국군 장병들은 새벽녘 은밀히 수중 도하를 시도하는 북한군에 집중사격을 가해 격멸하는 데 성공했다.
피로 물들었던 나루터는 이제 구미시민들이 즐기는 산책로로 변모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을 긴장감은 시원한 강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듯했다.
강을 따라 다시 칠곡으로 향하면 왜관철교(현 호국의 다리)를 건널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놓인 이 철도교는 낙동강 방어선 전투 승리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하기 위해 희생됐다. 당시 미군은 남하하는 북한군을 막고자 왜관철교 한 칸을 폭파, 추격을 따돌렸다. 다리를 잃는 안타까운 상황이었지만, 이는 이후 낙동강 방어선 전투의 승리와 인천상륙작전을 통한 대역전의 발판이 됐다.
다리는 끊겼지만 기둥은 그대로 남았다. 정부는 정전 이후 철교를 다시 복구해 지금까지 명맥을 이을 수 있도록 했다. 이제는 호국의 다리란 이름으로 주민들과 함께하고 있다.
철교를 둘러싼 안타까운 사연도 전해져 온다. 미 육군 제임스 호머 엘리엇 중위와 부인 알딘 엘리엇 블랙스톤 씨의 영원한 사랑 이야기다. 엘리엇 중위는 1950년 8월 왜관철교 인근에서 야간작전 중 실종됐다. 평생 남편을 기다리던 아내는 2015년 유해를 남편이 잠든 왜관철교에 뿌려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두 사람은 낙동강에서 영면에 들게 됐다.
다리 아래는 엘리엇 부부의 영원한 사랑을 기리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오랜 시간 기다린 아내에게 꽃을 건네는 남편의 손과 이를 붙잡으려는 아내의 손. 두 사람의 손끝은 아직 닿지 않았지만 이제는 두 번 다시 놓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왜관철교 뒤로는 ‘호국의 도시’ 칠곡이 자랑하는 애국언덕이 펼쳐져 있다. 손병선·박수환 선생 등 칠곡 출신 애국지사들의 묘비가 줄지어 세워진 이곳의 가장 높은 곳엔 왜관지구전승비가 있다. 잊힌 용사들의 넋은 그들이 온몸을 바친 낙동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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