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광은 짧았지만, 음악은 영원하리…

입력 2025. 12. 09   16:35
업데이트 2025. 12. 09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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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나폴레옹 시대의 마감 그가 남긴 예술적 유산

200여 년 전 유럽 뒤흔든 나폴레옹
항복→퇴위→유배→쓸쓸한 죽음
전쟁의 종말은 참혹했지만
정치·예술·문화 등 큰 영향
파이시엘로·메율 등 작곡가 전폭 지원
오페라 재정비·음악교육 개혁도 단행

1815년 워털루 전투 당시 격전지인 라에상트 농장 상황을 그린 리하르트 크뇌텔의 ‘라에상트의 돌격’. 출처=위키미디어
1815년 워털루 전투 당시 격전지인 라에상트 농장 상황을 그린 리하르트 크뇌텔의 ‘라에상트의 돌격’. 출처=위키미디어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가 개시됐다. 프랑스군은 왼쪽부터 공격을 시작했는데, 연합군의 웰링턴 장군은 이를 이미 알아채고 아주 강한 부대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전투 초기 프랑스군에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프랑스군 입장에서는 지형적인 이유와 어수선한 당시 상황으로 인해 연합군 중앙부대가 왼쪽으로 이동하는 것도 보이지 않아 상황 파악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연합군의 공세는 지속됐다. 급기야 중앙과 오른쪽에도 공격이 이뤄졌는데, 중앙에 있는 농장은 연합군이 철저히 대비하고 있어 프랑스 최정예 부대로도 쉽게 확보할 수 없었다. 양측은 이곳에서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교전을 반복했다.


나폴레옹의 부재, 결정적 패인 제공 


프랑스군은 오른쪽 언덕 뒤 연합군이 숨어 있는 위치까지 기동했다. 하지만 연합군은 여기에 정예 기병부대를 투입해 큰 피해를 줬다. 그럼에도 프랑스군은 증원을 통해 연합군 기병을 완전히 궤멸시키며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그런데 이때 나폴레옹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나폴레옹은 이미 과로와 스트레스로 여러 합병증을 보였는데, 특히 치질이 심해져 전투 전날 의사가 아편을 처방한 것이 문제가 됐다. 나폴레옹은 중요한 전투 지휘를 미셸 네에게 맡기고 의무실로 갈 수밖에 없었다.

네는 어떻게든 중앙의 라에상트 농장을 확보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상황에 연합군이 부대를 후퇴시키는 모습을 포착했다. 기회라 판단한 네는 40개 대대 규모의 정예 기병부대를 집중 투입했다. 그런데 사실 연합군은 후퇴한 것이 아니라 후방 부대와 교대 중이었다. 프랑스 기병부대는 보병과 포병의 지원 아래 움직여야 효과를 보는데 급한 나머지 기병만 단독으로 대규모 투입했으니 결과는 참담했다.


네의 잘못된 판단, 돌이킬 수 없는 파국

나폴레옹이 의무실에서 나오니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상태였다. 나폴레옹은 가장 믿을 수 있는 전략 예비부대인 제국 근위대를 투입해 중앙지역의 대대적인 돌파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웰링턴은 중앙 언덕에 총격부대를 집결시켜 집중사격을 가해 근위대를 무기력하게 무너뜨렸다.

이 상황에서 프로이센 군대가 전투 현장에 도착해 오른쪽 전장을 공격해왔다. 전방과 측방에서 완전히 협공을 당하는 양상이 됐다. 22시경 프로이센군은 합류했고, 태풍 같은 기세로 프랑스군을 몰아붙였다. 결국 프랑스군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웰링턴은 포획한 프랑스군의 대포를 모두 녹인 뒤 사자상을 만들어 워털루의 승리를 기념했다. 파리로 귀환한 나폴레옹은 의회 압력에 못 이겨 6월 22일 퇴위를 발표한다. 그리고 영국에서 지정한 대서양의 작은 섬 세인트헬레나로 유배를 가 최후를 맞았다.


전쟁의 종말과 유럽사회에 미친 영향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은 유럽의 기존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 놓았다. 혁명의 영향으로 절대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경험함으로써 이후 왕정체제에 저항하는 혁명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이는 결국 공화정체제로 전환하는 계기가 됐다. 대단한 변화다. 귀족이나 성직자 외에 평민들의 권리와 자유가 존중받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에 민족주의가 확산하면서 독립을 위한 투쟁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군사적 측면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우선 징병을 통한 국가 총력전 개념의 전쟁수행 체계가 만들어졌고, 군의 제대를 군단급으로 구분해 대규모 작전이 가능하도록 했다. 아울러 견고한 참모제도를 구축했는데, 이는 과거 프로이센이 이미 적용했던 체제를 도입하는 차원이었다. 그리고 포병 역할이 크게 높아져 기동력을 갖춘 포병여단급으로 확장됐고, 기병대가 중요하게 다뤄졌으며, 대규모 원정작전에 따른 보급지원체계도 큰 발전을 가져왔다.


나폴레옹이 남긴 예술적 유산

나폴레옹이 세인트헬레나섬에 유배를 가 숨을 거둔 것이 1821년이니 이제 200여 년이 지났다. 전 유럽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었지만 정치, 예술, 문화 등 모든 분야에 걸쳐 나폴레옹이 남긴 흔적은 여전히 많다. 특히 음악과 미술, 연극, 발레 등 예술에 관심이 지대했고, 통령과 황제 재위 기간에 많은 개혁을 단행하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아는 루브르박물관도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다. 원래 궁이었던 루브르 박물관은 나폴레옹이 유럽 전역에서 전쟁하면서 가져온 전리품을 전시하는 공간이 됐다. 개선문도 나폴레옹의 승리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세워졌다. 이 밖에 궁전 음악당과 극장 등을 새롭게 건축하고,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동원해 그림을 그리고, 공연과 연주회를 열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 히틀러가 음악을 선전·선동, 유대인 탄압 등의 도구로 삼은 것과 나폴레옹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쿠데타 혁명으로 집권한 것을 미화하고 유럽 각국과 전쟁하는 중 프랑스 이미지를 높이려는 의도였다고 보인다.

 

특히 음악 분야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탈리아반도 옆 코르시카섬 출신답게 나폴레옹은 이탈리아풍 오페라를 좋아했다. 당시 이탈리아 최고의 작곡가 조반니 파이시엘로(1740~1816)를 불러 자신의 음악당을 책임지도록 했다. 파이시엘로는 나폴레옹의 황제 대관식에서 행사 음악으로 쓰였던 ‘나폴레옹 대관식 미사’ 곡을 헌정하는 등 많은 곡을 만들었다. 나폴레옹은 다른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성악가들에게 작곡을 의뢰하고 공연 기회를 부여하기도 했다. 


프랑스 작곡가로는 에티엔 메율(1763~1817)

을 크게 신뢰했다. 나폴레옹은 메율에게 프랑스 아카데미 개혁을 맡기고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공연에도 자주 참석해 힘을 실어줬다. 메율은 나폴레옹을 위해 많은 곡을 작곡했다. 오페라 ‘분노한 사람’(1801), ‘나폴레옹 군의 귀환을 축하하는 노래’(1807), ‘황제의 결혼을 위한 노래’(1810) 등 다수가 있다.

나폴레옹은 오페라를 재정비하기 위한 계획을 단행하면서 일일이 레퍼토리를 검토해 공연하게 했다. 또한 ‘파리 오페라’를 ‘황실 음악 아카데미’로 이름을 바꾸고 극장을 새로 건축했다. 개혁이라는 이유로 많은 변화를 추구해 발전도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이념적 통제와 정치적 선전도구로 활용한다는 의도가 있었음이 분명하다.

음악교육에 대해서도 개혁을 단행했다. 파리음악원의 경우 존립이 어렵던 것을 재정지원과 기숙사 설치, 음악 회당을 건축했다. 특히 1803년 제정한 ‘로마상’은 지금도 최고 권위의 경연으로 평가받고 있다.


필자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필자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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