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귀환, 결전의 선율이 몰아치다

입력 2025. 12. 02   15:59
업데이트 2025. 12. 02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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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나폴레옹의 엘바섬 탈출, 그리고 워털루에서 최후의 결전

나폴레옹 유배지서 탈출해 파리 입성 
대불동맹군 화친 거부하고 선전포고
진흙탕투성이 워털루서 마지막 승부
조지 앤더슨, 웰링턴 공작에 곡 헌정
경쾌함 속 전투의 실상 그대로 전달

 

1815년 워털루 전투 장면(윌리엄 새들러 작품).
1815년 워털루 전투 장면(윌리엄 새들러 작품).

 


나폴레옹은 1814년 4월 퇴위 후 5월에 이탈리아반도 서쪽, 그가 태어난 코르시카섬 북동쪽에 있는 엘바섬(인구 1만2000여 명)으로 유배를 갔다. 나폴레옹이 언제 다시 무장해서 복수할지 모른다는 걱정과 우려를 반영해 이곳으로 결정됐다. 엘바섬의 영주(공작)로 간 나폴레옹은 유배 갔음에도 광산 개발과 도로 건설, 법령과 교육제도 정비 등 많은 것을 발전시키려고 애썼다.

주민의 반응은 좋지 않았는데, 주민을 각종 공사에 동원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엘바섬에는 1000여 명의 군대가 있었는데 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루이 18세(1755~1824)가 주기로 약속한 약 200만 프랑의 연금 지출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이 주민으로부터 세금을 거둬 군대를 운용하다 보니 일부 주민은 이를 거부하는 사태도 발생했다.

프랑스는 루이 18세가 다시 왕정체제로 복고한 데다 여러 실책으로 내부 불만이 커졌고, 러시아 같은 주변국과의 마찰도 생겼다. 나폴레옹을 제거하려고 암살자를 사주하기도 했다. 또한 나폴레옹을 화나게 한 것은 아들 나폴레옹 2세(1811~1832)를 엘바섬으로 보낼 것이라 믿었는데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조지 앤더슨의 ‘워털루 전투’ 악보 일부
조지 앤더슨의 ‘워털루 전투’ 악보 일부

 


나폴레옹 탈출 감행, 다시 황제 즉위


나폴레옹은 유배 간 지 약 9개월 만인 1815년 2월 15일 1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엘바섬을 탈출, 3월 1일 프랑스 남부 칸에 닻을 내렸다.

이 소식에 루이 18세는 군대를 보내 진압하도록 했으나 현장에 도착한 병력이 오히려 나폴레옹을 추종하는 상황으로 돌변했다. 나폴레옹은 곧장 파리로 진격했고, 놀란 루이 18세는 영국으로 도피했다. 프랑스 국민은 나폴레옹의 귀환을 환영했다. 그는 3월 20일 파리로 입성해 다시 황제의 자리에 앉았다.

오랜 전쟁으로 지친 상황이라 재정적 어려움과 함께 국가적 차원의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나폴레옹도 영국과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등에 화친을 제안했다. 그러나 약 7~8년을 나폴레옹에 의해 큰 피해를 입은 유럽 각국은 이를 받아들이면 나폴레옹이 언젠가 다시 침략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따라서 현재의 벨기에 브뤼셀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과 프로이센군은 프랑스에 다시 선전포고하고 나폴레옹을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했다. 최후의 결전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대불동맹군 분리해서 격파 계획

나폴레옹도 군대를 이끌고 벨기에 지역으로 달려갔다. 프랑스군이 상대할 적은 프로이센군 12만 명과 웰링턴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9만 명으로, 이들을 분리해 각개격파할 계획이었다. 6월 16일, 리니에서는 나폴레옹이 프로이센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으나 시기를 놓쳤다. 기병이 부족해 추격전을 하지 못함으로써 결정적 호기를 놓치게 된다.

콰트르 브라(워털루 지역으로 가는 길목)에서는 나폴레옹 휘하의 미셸 네 장군이 웰링턴 장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양측 모두 가벼운 피해만 입었다. 영국과 네덜란드 연합군은 워털루 지역으로 후퇴해 재정비했다. 프로이센군은 리니에서 나폴레옹에게 패한 후 후퇴함으로써 워털루로 합류하려는 당초 계획이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 개시 상황도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 개시 상황도



나폴레옹과 웰링턴 장군의 마지막 승부

6월 18일 오전 11시30분, 프랑스군 포격으로 워털루 전투가 시작됐다. 그런데 하루 전날 밤까지 많은 비가 내려 진흙탕투성이였고, 포병 운용에 어려움이 많은 상태였다. 또한 프랑스군이 진격해가는 기동로 왼쪽(위고몽)과 중앙(라에상트)에 각각 한 개씩 대형 농장이 있었는데, 이는 기동에 제한요소가 되며 방어하는 영국 연합군에는 유리했다.

전투 상황도에서 하단의 청색이 프랑스군이고, 상단의 적색이 영국 연합군이다. 왼쪽 중간에 네모 표식이 위고몽 농장, 중앙의 영국 연합군 지역에 표시된 네모 표식이 라에상트 농장이다. 나폴레옹의 계획은 중앙과 오른쪽의 부대는 잘 보이지 않으므로 우선 눈에 잘 띄는 왼쪽을 먼저 공격하면 연합군이 이를 증원하기 위해 중앙에서 왼쪽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그 틈을 타 중앙으로 공격해 각개격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다음 호에 워털루 전투 계속).


악보 곳곳에 전투장면 표현

워털루 전투와 관련해 영화와 미술 작품 등 많은 예술작품이 있다. 영국의 바이올리니스트이자 피아니스트인 조지 앤더슨(1793~1876)은 1860년 ‘워털루 전쟁’이라는 피아노 소품을 내놓았다. 처음 이 곡이 완성된 시기는 1818년으로 추정되며, 당시 웰링턴 공작에게 헌정됐다. 경쾌한 느낌을 주지만 사실은 전투의 실상을 그대로 전달하기 위해 악보 곳곳에 전투 장면을 표현했다.

악보 첫 장에는 ‘전선에의 전진’ ‘대포’ ‘전투’ 등이 적혀 있고, 그다음에는 ‘영국 기병이 프랑스군을 공격하기 위한 전진’ ‘프러시아의 전진’ ‘대포격’ 그리고 ‘프랑스군의 후퇴’ ‘나팔’ ‘환희’ ‘참혹함에 대한 슬픔’ 등이 묘사돼 있다. 피아노 소품이라 연습곡으로 많이 활용되며, 약 4분 조금 넘게 연주된다. 사진=필자 제공


필자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필자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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