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투 더 스테이지 -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동명의 영화 뮤지컬화…3년 만에 재연
황정민·정성화·정상훈 빵빵한 캐스팅
배꼽 잡는 코미디 속 가족의 의미 여운
눈 밑 주름까지 섬세한 노인 특수분장
아빠→할머니 10초 만의 변신에 감탄
로빈 윌리엄스 잊게 만든 열연도 눈길
|
수런수런했던 공연장의 불이 꺼지고 막이 열리길 기다리는 시간. 마음 한쪽에선 이미 작은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이번 시즌 뮤지컬 ‘미세스 다웃파이어’ 관람을 앞두고 캐스트 결정에 꽤 긴 고민이 있었다. ‘1000만 배우’ 황정민이냐, 초연 때 감동을 안겨 줬던 정성화냐, 아니면 코믹연기의 장인 정상훈이냐. 세 사람 모두 무대에서 무엇을 보여 줄지 어느 정도 예상되는지라 좀처럼 고르기가 어려웠다. 이후 ‘정성화냐, 정상훈이냐’ 이파전으로 좁혀진 가운데 정성화는 최근 ‘알라딘’에서 ‘지니’로 보고 왔으니 이번엔 정상훈으로 가 보자고 마음이 기울었다. 결과적으로 좋은 선택이었다.
2022년 국내 초연에서 정성화의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그야말로 1인극에 가까운 맹활약이었다. 극의 초점이 오롯이 정성화에게 맞춰져 있었고, 그의 개인기 총량을 확인하고 돌아왔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사실 정상훈도 비슷한 기대를 품고 샤롯데씨어터로 향했다.
두 사람이야말로 뮤지컬계 최고의 개그감을 장착한 인물이 아닌가.
여기서 잠깐. 이 둘은 무명 시절 함께 자취생활을 했을 정도로 각별한 사이였다(지금도 그럴 것이다). 정성화가 1975년생으로 정상훈보다 한 살 형이다. 정성화는 개그맨, 정상훈은 탤런트로 데뷔했지만 많은 사람이 둘의 장르가 뒤바뀐 것 아니냐고 의심할 정도로 정상훈은 개그 연기에 일가견이 있었다. 그의 주특기가 대중적으로 폭발한 것은 역시 SNL이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여장한 할머니 유모로 무대에 오른다는 사실만으로도 공연은 이미 절반쯤 성공한 셈이었다.
|
하지만 놀랍게도 정상훈의 ‘미세스 다웃파이어’는 웃음 너머의 그림자가 더 크게 보였다. 아이들과 만나지 못하게 된 아빠 다니엘의 아픔·좌절·고독·책임감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하게 그려졌다. 10년 전이라면 아마 다른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을까. 무대 위의 정상훈은 캐릭터 뒤에 자신을 완벽하게 감추고 있었다. 이런 변화는 주변 인물들을 또렷하게 드러나게 했다. 처음 봤을 땐 “거 좀 심하시네” 싶었던 아내 미란다가 이해됐고, 세 아이에게선 아빠를 향한 사랑뿐만 아니라 이혼가정 아이들의 두려움·바람·간절함이 읽혔다. 무대 중앙의 조명이 다니엘에서 조금씩 옆으로 번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뮤지컬의 줄거리는 1993년 크리스 콜럼버스 감독, 로빈 윌리엄스 주연의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알고 있는 내용과 같다. 성우인 다니엘은 애드리브를 남발하다가 잘리고, 아내 미란다와 이혼하고, 법원에 의해 일주일에 한 번만 아이들을 볼 수 있게 된다. 다니엘은 프랭크와 안드레의 도움을 받아 할머니 다웃파이어로 변장해 가족이 있는 집으로 다시 들어간다. 매우 코믹한 설정이다.
영화만큼이나 뮤지컬도 다웃파이어 할머니의 특수분장이 화제다. 실리콘 마스크는 배우의 볼 파임, 입꼬리, 눈 밑 주름까지 섬세하게 표현했다. 분장에서 의상으로 이어지는 퀵체인지는 거의 마술에 가깝다. 무대에서 딱 10초 만에 ‘아빠’에서 ‘할머니’로 변신하는 순간 관객의 입에서 신음 같은 탄성이 흘러나오고 만다. 넘버 ‘Easy Peasy(식은 죽 먹기)’ 장면은 두 번을 봐도 재밌다. 다니엘이 요리 영상을 따라 하다가 주방을 엉망으로 만드는 이 장면은 고든 램지 영상을 패러디한 것으로 꽤 볼 만하다. 레시피 영상, 숏폼, ASMR 등 요즘 관객에게 익숙한 언어를 능숙하게 비틀었다.
1막 후반, 아동보호과 소속 공무원으로 다니엘의 관리감독관인 완다가 다니엘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도 잊을 수 없다. 다니엘이 거실과 욕실을 분주히 오가며 다웃파이어와 다니엘을 번갈아 연기하는 동안 프랭크와 안드레가 개입하고 뒤엉키면서 이 작품 특유의 콩트적 짜임새 재미가 폭발한다. 이 장면에서 우연히 던져지는 ‘입양’이란 단어는 2막 엔딩을 향한 복선이기도 하다.
|
|
2막 레스토랑 ‘라 로사’ 장면은 압도적이다. 자넷 PD와의 식사엔 다니엘로, 가족과의 식사 테이블엔 다웃파이어로 참석해야 하는데 하필 두 일정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 플라멩코 가수가 “날 속인 남자를 저주한다”는 노래를 부르는 와중에 다니엘은 화장실과 홀 사이에서 몇 초 단위로 변장과 목소리를 바꾼다. 코미디가 정점에 이르는 순간, 결국 정체가 들통나 버리면서 극의 흐름이 바뀌게 된다.
‘Just Pretend(그냥 괜찮은 척)’는 다니엘과 큰딸 리디아가 부르는 넘버로 마주 앉아 서로에게 ‘괜찮은 척’을 거두는 장면에 나온다. 코미디로 차곡차곡 쌓아 온 앞부분이 모두 이 순간을 위해 준비된 것처럼 느껴진다.
이 작품의 엔딩을 좋아한다. 모두가 활짝 웃으며 행복해하는 해피엔딩이지만, 아마 다니엘과 미란다의 재결합은 이뤄지지 않을 것이다. 이 작품의 결말은 ‘재결합’이 아닌 ‘새로운 가족 형태’의 탄생이기 때문이다. 프랭크와 안드레의 퀴어 가족, 완다와 아들, 자넷과 조카 루피 레니, 그리고 다니엘과 미란다의 확장된 가족. 모두가 ‘As Long as There Is Love(사랑만 있다면)’를 함께 부르는 마지막 장면은 새로운 가족의 탄생을 선포하고 축하하는 군대의 나팔 소리처럼 들린다.
영화든, 뮤지컬이든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늘 로빈 윌리엄스(1951~2014)가 그리웠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이해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상훈의 ‘미세스 다웃파이어’를 보면서 로빈 윌리엄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있었다.
“안녕, 윌리엄스. 여전히 앞으로도 당신을 기억하고 사랑하겠지만, 이젠 더 이상 당신이 유일한 다웃파이어일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동안 고마웠어.” 사진=샘컴퍼니
해당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
이 기사를 스크랩 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