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저항의 선율…자유 향한 열망을 노래하다

입력 2025. 10. 28   16:18
업데이트 2025. 10. 28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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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나폴레옹의 빈 점령과 피아노협주곡 ‘황제’의 탄생

이베리아반도서 나폴레옹 어려움 겪자
오스트리아 20만 대군 무모한 공격 감행
결국 바그람전투 패배로 빈 점령 당해
베토벤, 빗발치는 포격에도 작곡 열중
나폴레옹 반감에 고난 극복 의지 담아
3악장 구성…피아노협주곡 으뜸 꼽혀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툴롱포위전을 통해 부상한 나폴레옹은 파리 치안질서를 장악하면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이어 대(對)프랑스 동맹국과 전쟁을 시작하며 이탈리아 원정사령관으로 임명돼 진면모를 보여줬다.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나폴레옹은 1804년 마침내 황제로 즉위했다. 영국과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패하며 기세가 약화되기도 했으나 다시 내륙의 울름전투와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를 패퇴시키면서 유럽 대륙 패권을 장악했다. 하지만 1806년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내린 대륙봉쇄령이 오히려 부메랑이 돼 발목을 잡기 시작했다. 지중해 해상권 장악을 위해 벌인 이베리아반도 전쟁에서도 게릴라전의 늪에 빠지며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베리아반도 상황이 채 정리되기도 전 오스트리아와 다시 전쟁이 벌어졌고, 전투력이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 원정도 준비하게 됐다.

 

오라스 베르네의 '바그람 전투'(왼쪽)와 베토벤. 필자 제공
오라스 베르네의 '바그람 전투'(왼쪽)와 베토벤. 필자 제공

 


오스트리아의 무모한 모험, 결국 빈이 점령되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참패한 뒤 절치부심하고 있던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 군대가 이베리아반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다. 오스트리아는 1809년 4월 9일 약 20만 명을 이끌고 바이에른공국(뮌헨 지역)과 바르샤바 공국, 이탈리아반도 등 3개 방향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하지만 이미 이들의 의도를 알고 있던 나폴레옹은 즉시 18만 명에 이르는 병력을 이동시켰다. 나폴레옹 군대는 4월 18일 바이에른주 잉골슈타트에 도착했다. 4월 20일 나폴레옹은 오스트리아가 3개 방향으로 분산 공격할 것으로 판단해 각개격파 전략을 세웠다. 특히 나폴레옹이 이끄는 주력 병력 9만 명은 바이에른공국으로 진입한 오스트리아 군대를 전위, 좌익, 우익 등 3개 방향에서 공격해 본토로 철수시켰다.

5월 13일 빈에 입성한 나폴레옹은 도나우강을 사이에 두고 오스트리아와 결전을 펼쳤다. 핵심은 어떻게 도나우강을 건너느냐였다. 나폴레옹은 여러 차례 시도에도 번번이 오스트리아군에 패했다. 결국 그는 빈 근교에서 정비하면서 독일과 이탈리아 병력 등 약 15만 명을 집결시켰고, 6주 후인 7월 4일 폭풍우가 몰아치는 틈을 타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도나우강을 도하한 10만 병력은 바그람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양측 합해 30만 명이 운집한 전투였다. 나폴레옹은 기병부대 돌격과 대구경 포병 집중 운용으로 오스트리아군을 격퇴하고 전투를 마무리 지었다. 바그람 전투에서 양측은 각각 4만여 명의 사상자가 있었지만, 오스트리아군 사기가 더 크게 저하됐다.




베토벤, 불안과 공포 속 빈의 분위기를 피아노 건반에 담아

이때 베토벤도 빈에 있었다. 프랑스군 포격이 빈 도심에 빗발치자 대부분 다른 곳으로 피했지만, 그는 포성이 울려 퍼지는 상황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곡을 남겼다. ‘피아노협주곡 5번(Piano Concerto No. 5 in E at major, Op. 73)’, 이른바 ‘황제’로 알려진 곡이다. 1808년 4월부터 오스트리아가 작전을 준비했는데, 작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도 그 무렵이다.

따라서 나폴레옹에 대한 강한 반감을 그대로 표현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당시 베토벤은 전쟁 상황으로 후원이 끊겨 경제적 어려움에 처해 있었고, 귀가 점점 들리지 않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포격 피해로 동생의 집 지하실로 대피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곡의 전체 분위기는 고난과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강한 의지가 넘쳐난다. 힘차고 당당한 이 곡에는 빈에 입성한 나폴레옹 군대를 격퇴하고 전쟁에서 어떻게든 승리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곡은 모두 3악장으로 구성됐다. 1악장은 관현악 연주로 시작되지 않고 피아노 독주로 큰북과 함께 전쟁의 광기를 알리는 듯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이 특징이다. 이어지는 관현악 연주는 마치 전쟁이 곳곳에서 막 진행되는 듯이 긴박하게 연주된다. 2악장은 1악장에 비해 다소곳하고 생각에 잠기게 하는 분위기가 느껴진다. 어찌 보면 2악장은 빈의 시민에게 조용히 차근차근 설명하며 끝까지 싸우자는 저항의지를 북돋우는 일련의 과정 같기도 하다. 3악장은 피아노와 관현악이 조화를 이루며 박진감 있게 연주된다.

곡의 부제인 ‘황제’는 베토벤이 아닌 후대에 출판업자들이 붙인 것이라고 한다. 연주회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이 피아노협주곡 중 가장 으뜸인 황제의 위치에 해당한다는 찬사를 듣고 붙인 것으로 본다. 흔히 나폴레옹 황제에게 헌정한 곡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오히려 나폴레옹에 대한 강한 증오심과 저항의지를 담고 있다.


삶을 비관했던 베토벤, 시련과 역경을 극복하고 인류에 평화의 메시지

베토벤은 30세가 된 1800년부터 청각에 이상이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10년 뒤부터는 거의 듣지 못하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베토벤이 청력을 잃은 것에 대해서는 여러 연구가 있다. 알코올 중독 때문에 그랬다거나 장티푸스에 의한 것, 내이염·결핵 등이 원인이 됐다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대체로 1796년 베를린으로 연주 여행을 갔을 때 발진티푸스를 앓고 난 뒤 부작용 때문이라는 설이 정설로 여겨졌다.

그러나 2024년 5월, 미국 하버드대학교 연구팀은 베토벤의 머리카락에서 정상 수치보다 최대 95배 더 많은 납 함유량을 확인했다. 비소, 수은 등 독성 물질을 발견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하며 그가 납중독에 의해 청력을 상실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베토벤은 대단한 와인 애호가로 하루에 1병 정도를 마셨다고 한다. 당시 값싼 포도주는 맛을 좋게 하기 위해 아세트산 납을 첨가하는 사례가 많았다고 한다. 베토벤은 숨을 거둘 때까지도 뤼데스하이머 와인을 한 숟가락씩 마셨다고 한다.

베토벤은 청력 상실로 비관에 빠져 절망하며 고립될 수밖에 없는 삶을 살았다. 1802년에는 잘 알려진 ‘하일리겐슈타트 유서’를 쓸 만큼 괴로웠고, 실제로 삶에 대한 포기도 염두에 뒀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술적 운명을 완성하기 위해 신체·정서적 질병을 극복하려는 그의 끊임없는 열망은 식지 않았다. 불행한 운명을 극복하고 신의 메시지를 우리 인류에게 가장 존엄하게 전달하기 위해 베토벤은 숨을 거둘 때까지 음악을 구상했다. 이것이 우리가 그를 존경해야 하는 이유이고, 인류가 그를 ‘악성(樂聖)’ ‘음악의 성인’이라고 부르는 이유일 것이다.


필자 서천규 국방부 군비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클래식과 전쟁사』 등이 있다.
필자 서천규 국방부 군비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육군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는 『클래식과 전쟁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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