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예일대의 폴 브래큰 교수는 자신의 2012년 저서에서 소수의 초강대국이 핵질서를 지배하는 시대가 마감되고, 다양한 변수와 위험성이 혼재하는 ‘다극적 핵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설파했었다. 핵무기를 빼면 가진 게 없다시피 한 빈소국 북한이 핵초강국 러시아와 손잡고 세계를 위협하고 한미동맹을 흔드는 것을 보면 그가 예언했던 ‘제2차 핵시대’는 이미 실현되고 있다. 이런 시대에 한국은 북핵 고도화가 초래할 ‘동맹 이완효과(decoupling effect)’를 경시하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한반도의 안보지형과 한국의 운명을 바꿀 만큼의 폭발력을 가질 수 있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지금 중·러는 안보리의 대북제재를 차단하는 방패막이가 돼 북핵을 두둔하고 있다. 러시아는 북한군의 우크라이나 파병 대가로 북핵 고도화를 도울 태세다. 이는 제1차 핵시대에서는 꿈도 꾸지 못했던 일이다. 그때는 두 핵강국이 서로 대립하면서도 온 인류의 핵안보와 자신들의 핵기득권 보호라는 공동목표를 위해 추가적인 핵확산을 막는 데 협력했었다. 즉 이념적 동서(東西) 냉전과 별개로 ‘핵의 남북관계’에서는 공히 북쪽(핵보유국) 국가들로서 남쪽(비핵국)의 핵개발을 견제하는 데 손을 잡았었다. 그래서 미국이 한국의 핵무장을 가로막는 동안 소련은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을 종용했었다. 오늘날에는 미국이 동맹국 한국에 확장억제라는 핵보호막을 약속하면서도 여전히 핵보유를 만류하는 데 반해 러시아는 북한을 아예 ‘핵세계의 북쪽 나라’로 영입해 더불어 ‘격변의 축(axis of upheaval)’을 구축 중이다. 제2차 핵시대의 개막과 신냉전의 도래가 중첩되면서 발생하는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러시아의 첨단 핵기술을 제공받아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재진입(re-entry) 능력을 완성한다면, 한 발의 미사일로 미국의 대도시들을 동시에 공격하는 다탄두 독립비행체(MIRV)까지 갖춘다면 한미동맹의 신뢰성은 뿌리째 흔들릴 수 있다. 미국에서는 “한국이 북한의 핵보복 위협까지 받으면서 지켜 줘야 하는 나라인가”라는 볼멘소리가 퍼질 것이고 신고립주의 여론의 확산, 한미동맹 이완, 대한(對韓) 확장억제 공약의 약화 등 연쇄반응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면 ‘가장 황당한 상황’의 도래 가능성에 한국 국민의 핵악몽은 깊어질 것이다. ‘황당한 상황’이란 북핵 위협이 진실로 임박함에도 미국이 자국의 안전을 의식해 확장억제 작동의지를 천명하지 않고 미적거리는 경우를 말한다. 제2차 핵시대에서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이런 사태가 길어지거나 반복되면 남북은 ‘송아지와 늑대(牛狼)’ 관계로 들어설 것이며, 최악의 경우 북한의 결정적 오판을 초래할 수 있다. 그럴 경우 한국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이후 최초로 핵참화를 겪는 나라가 될 것이고, 미국의 ‘무책임한 동맹정책’은 세계 여론의 도마에 오를지도 모른다.
한국이 당장은 아니더라도 특정한 상황이 도래하면 신속하게 핵무장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평소 머금고 있어야 하는 이유이며, 동시에 미국이 한국의 농축·재처리 활동을 무작정 가로막고만 있어서도 안 되는 이유다.
한국은 북한군 파병 이래 줄곧 러시아와 북한을 향해 “선을 넘지 말라”고 외쳐 왔는데, 사실 이는 한미가 함께 외쳐야 할 말이다. 북핵 고도화를 위한 기술협력은 러·북이 넘지 말아야 할 최후의 선이며, 그 선을 넘을 경우 내놔야 할 대응책도 동맹 차원에서 한미가 함께 강구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2차 핵시대의 한미동맹은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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