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영웅으로 약자 돌보미로…평생 ‘헌신의 삶’

입력 2023. 03. 22   16:59
업데이트 2023. 03. 22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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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인간 - 아름다운 생을 살다 간 영웅 
-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

독립운동가 아들로 미국서 출생
2차세계대전 참전 유럽서 맹활약
미국·이탈리아·프랑스 10여 개 훈장
6·25전쟁 발발 재입대 전선으로
금병산전투 등서 잇따라 승리
성금 모아 고아원 재정 지원
전역 후 이산가족·이민자 도와
미 연방의회 금메달 수여 추진

군사 고문단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김영옥. 사진=국가보훈처
군사 고문단으로 근무하던 시절의 김영옥. 사진=국가보훈처

 

김영옥의 전기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북스토리, 2012) 표지.
김영옥의 전기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북스토리, 2012) 표지.

 

일본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100대대가 사열받는 모습. 필자 제공
일본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100대대가 사열받는 모습. 필자 제공

 


1943년 9월, 이탈리아에 상륙한 연합군은 독일군의 방어선 ‘구스타프 라인’을 넘지 못한 채 발이 묶이고 말았다. 이탈리아 중남부 지역에 허리띠를 두른 것처럼 설치된 구스타프 라인은 난공불락의 방어선이었다. 알베르트 커셀링(1885~1960)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은 좁은 계곡에 들어서는 연합군을 효과적으로 차단했다.

초조해진 연합군은 방어선 배후의 ‘안지오’ 해안에 미군을 상륙시켰다. 상륙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구스타프 라인 뒤쪽에 미군이 상륙하자 독일군은 혼란에 빠졌다. 안지오에서 로마까지는 지척이었고, 후속 부대까지 들어오면 거꾸로 구스타프 라인에 배치된 독일군이 포위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륙한 미군은 신중을 기하다가 진격할 시기를 놓쳤다. 독일군은 즉시 북이탈리아에서 증원부대를 끌어와 안지오에 투입했다. 안지오의 미군은 해변을 등진 채 전멸 위기에 몰렸다. 미군은 독일군 기갑부대와 화포의 배치 상황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하와이 100대대 소속의 소대장이 포로를 생포해 오겠다면서 자원했다. 대대장이 무모하다고 일축했으나 소대장은 지휘관들을 계속 설득했다.

미군 장교들은 100대대 구성원들을 불신했다. 1941년 12월, 진주만이 공격당하자 미국 정부는 일본계 이민자들을 잠재적인 적으로 규정하고, 12만에 달하는 일본계 시민들을 수용소에 가뒀다. 일본계 이민자의 2세들은 자기들도 미국인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자원입대했다. 100대대는 그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포로 생포 작전을 자원한 장교는 당시 일본의 식민지 조선 출신인 ‘김영옥’이었다.

김영옥과 부하 아카호시 일병은 동트기 직전 독일군 진지로 출발했다. 두 사람은 지뢰밭과 철조망 지대를 통과해 독일 병사 2명을 생포해 돌아왔다. 미군은 포로에게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포위망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안지오의 늪에서 빠져나온 미군은 곧장 로마로 진격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주둔 미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중장은 김영옥을 대위로 특진시켰다. 김영옥이 이끄는 부대는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토스카나 인근의 도시 피사를 해방시켰고, 이듬해 프랑스 전선에서는 브뤼에르, 비퐁텐 지역을 해방시켰다. 그는 비퐁텐 전투에서 기관총탄을 맞았으나 겨우 목숨을 건졌다. 로마 진군과 비퐁텐 전투 참가 공로로 김영옥은 미국 정부가 수여하는 은성무공훈장과 함께 이탈리아 정부의 무공훈장과 프랑스 정부의 십자무공훈장을 받았다. 특히 프랑스 정부는 종전 후 국가 최고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여해 그의 공적을 기렸다.

독립운동가 김순권(1886~1941)의 아들인 김영옥은 1919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출생했다. 김영옥은 아버지에게 철저한 반일 교육을 받고 자랐으나 미 육군 장교 예비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할 때 일본계 미국인들로 구성된 100대대에 자원했다.

미군 본부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갈등을 우려해 김영옥을 다른 부대로 전출시키려고 했지만 그는 모두가 미국 시민으로 싸운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부대에 남았다. 독일과 함께 전쟁을 일으킨 일본을 향한 분노가 가득했던 시기에 김영옥은 일본계 이민자의 후손들로 구성된 부대를 이끌고 10개가 넘는 훈장을 받았다.

포병 전술과 보병 전술을 융합한 그의 활약은 미군의 전술 교본까지 바꾸었다. 김영옥과 함께 이탈리아 전선에서 싸웠던 병사 나베 다카시게는 이렇게 그를 회고했다. “그는 늘 선봉에 섰습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두려움이 없었어요. 그러니 우리가 그를 존경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종전 후 김영옥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코인 세탁사업을 시작해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사업을 접고, 재입대하여 한국으로 향했다. 1950년 1월 미국의 애치슨 라인 선포는 한반도에 전쟁이 발발하게 된 계기가 됐다.

미국 국무장관 딘 애치슨(1893~1971)의 어리석은 선택으로 김영옥은 미국이 한국에 커다란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시민으로서 아버지의 나라를 조금이라도 돕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한국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것이라고 여겼다. 김영옥은 통역장교로 안전한 곳에서 근무할 수 있었지만, 전투부대 지휘를 자원해 전선에 뛰어들었다.

1951년 5월, 중공군의 2차 춘계공세 때 김영옥의 부대는 구만산·탑골 전투와 금병산 전투를 겪었다. 김영옥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에서 싸운 자신의 경험을 살려 사기가 떨어진 부대원을 독려해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김영옥이 소속된 미7사단은 아군의 오폭을 받을 정도로 빠르게 진격했다. 현재 휴전선의 중부 전선 돌출부는 김영옥 부대의 최대 진격선과 거의 일치한다.

김영옥은 전투에서만 활약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휘하 장병들이 1인당 50센트씩 모금해 마련한 지원금 145달러(한화 약 19만 원)를 ‘경천애인사’라는 고아원에 지원했다. 김영옥은 지속적으로 고아원에 재정지원을 할 방법을 고안했다. 현금, 맥주·담배 등을 감리교단을 통해 지원했고, 초콜릿과 사탕은 직접 고아원에 전달했다. 6·25전쟁에서 일선 전투부대로서 고아원을 특정해 재정 지원을 한 유엔군 부대는 김영옥의 부대가 유일했다. 당시 경천애인사에서 도움을 받은 전쟁고아는 500명이 넘었다.

휴전 후 김영옥은 독일 주둔 미7사단에서 최초의 아시아계 미군 대대장으로 근무(1956~1959)했다. 군사고문단으로 다시 한국에 근무(1963~1965)하는 동안 김영옥은 대공 미사일 부대 창설에 기여했다. 1972년 전역한 김영옥은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한인건강정보센터’를 설립해 이산가족과 고령 이민자들을 도왔다. 이 센터는 훗날 연간 500만 달러(한화 약 65억3000만 원)가 넘는 예산을 집행하는 미국 최대의 소수계 비영리 보건기관이 됐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정확히 아는 이는 별로 없다. 그는 누구에게도 자랑 삼아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6·25전쟁 때 훈장 수여자로 지명됐을 때도, 연대장에게 “훈장은 이미 받을 만큼 받았다”고 사양하면서 부하들에게 수여해 달라고 요청할 정도였다.

부상 후유증에 시달리던 김영옥은 2005년 12월 29일 사망했다. 올해 1월, 미국 의회에서 한국계 하원 의원 4명이 김영옥에게 미국 연방의회의 금메달을 수여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2012년 국내에 출간된 전기 『아름다운 영웅, 김영옥』을 읽으면서 여러 차례 놀랐다. ‘전쟁 영웅’이라는 호칭은 그에게 부족하다. 그는 진정 아름다운 생을 살았던 영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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