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군 총칼에 맞선 스페인 민중의 항거

입력 2023. 03. 21   16:51
업데이트 2023. 03. 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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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미술 기행 - 세상을 외면하지 않은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 ‘1808년 5월 3일’

스페인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

궁정화가 일하며 굴곡진 인생 경험

나폴레옹 형 호세1세 즉위 식민지 전락
폭정에 분노한 민중 봉기 실패로 끝나
무자비한 복수의 학살 정면 고발
학살자의 구도, 마네·피카소에 영향

프란시스코 고야의 ‘자화상’
프란시스코 고야의 ‘자화상’


프란시스코 고야는 벨라스케스와 더불어 스페인을 대표하는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입니다. 그도 스페인 왕가의 궁정화가였기에 벨라스케스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는데요. 벨라스케스가 스페인 황금기의 마지막 시절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군주 아래서 자신의 역량을 마음껏 펼쳤다면, 고야는 스페인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살아가며, 평화로운 시절부터 전쟁과 내전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고통받은 모습까지 지켜봐야 했습니다. 

평탄한 삶을 살아왔던 벨라스케스와는 달리 너무나 굴곡진 인생을 살아서인지 고야의 작품들을 전반적으로 쭉 살펴보면, 이 모든 작품이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화풍 변화가 누구보다 극단적이죠. 현대 건축가이자 화가였던 르 코르뷔지에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려 하는 만큼 보이는 것이다.”

혼란스러웠던 시절 그 누구보다 냉철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담담히 담아낸 고야의 작품은 지금도 많은 사람에게 큰 울림을 전해주곤 합니다.

1789년 프랑스에 혁명이 발발하고 왕과 왕비의 목까지 잘려나가는 큰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당시 스페인 왕조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에서 파생된 왕조로, 스페인의 왕 카를로스 4세는 혁명 후 처형당한 루이 16세와는 사촌지간이었죠.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스페인 왕가는 아무런 변화를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무능하고 부패한 이 왕조는 위태로운 시간만을 낭비할 뿐이었죠.

그렇게 혁명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이 등장하며 ‘자유·평등·박애’를 기치로 걸고 스페인 민중을 해방하겠다는 명목으로 침략해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은 폐위 당했고 왕족 대부분은 프랑스 남부로 유배를 갑니다.

이후 나폴레옹은 자신의 형 조제프보너파트만을 스페인의 새로운 왕인 호세 1세로 즉위시키는데요. 당시 스페인의 많은 지식인은 의외로 프랑스군의 진출을 반겼습니다. 구체제에서 벗어나 합리적인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죠. 고야 역시 이러한 지식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형 호세 1세 치하는 합리적이지도 계몽적이지도 않았으며, 스페인은 그저 나폴레옹 군대의 군수품을 조달하기 위한 식민지로 전락했을 뿐이었습니다. 이에 반발이 스페인 곳곳에서 일어났고 곧 전국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맙니다.

구원일 것이라고 믿었던 프랑스 군대의 광기에 가족과 이웃들이 살해당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본 고야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그 잔혹한 학살 속에서 고야는 숨지 않고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지켜봤습니다. 그리고 『전쟁의 참화』라는 판화집을 통해 자신이 목격한 전쟁의 잔혹함을 세상에 알리게 되죠. 또한 고야는 ‘거인’이라는 작품을 통해 전쟁의 광기 속에서 고통받는 나약한 민중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1814년 나폴레옹 몰락 이후 고야는 복권한 페르난도 7세의 요청으로 민중의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할 목적으로 위대한 두 걸작을 탄생시키게 되는데요. 그 첫 번째 작품은 바로 ‘1808년 5월 2일’입니다. 프랑스군의 지배가 시작되고 폭정에 분노한 스페인 민중은 결국 봉기를 일으키게 됩니다. 하지만 봉기라고 해봤자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길거리에 있는 돌을 집거나, 집에 있는 칼을 들고나오는 수준이었죠.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2일’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2일’

 
중앙의 한 남성은 분노에 이성을 잃은 채 적이 죽은 줄도 모르고 계속 칼로 찌르고 있으며, 화면 좌측에서는 직접 손으로 적군을 말에서 끌어 내리고 있는 민중들이 보입니다. 이는 시민들이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거나 이 일이 계획된 사건이 아니라 순전히 우발적으로 일어난 봉기임을 보여주는 것이죠.

당시 유럽 전역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나폴레옹군은 이집트 기병을 용병삼아 스페인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는데요. 8세기부터 1492년까지 약 700여 년간 이슬람세력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싸워왔던 스페인 사람들에게 이집트 용병의 지배는 너무나도 굴욕적인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프랑스군은 성난 민중에 놀라 퇴각하기 시작했고, 그날 밤 봉기가 확산하자 프랑스군은 마드리드에서 발포를 허용하게 됩니다. 그리고 수도 마드리드는 시민들의 피로 물들어 갑니다.

이어지는 작품은 ‘1808년 5월 3일’입니다. 결국 민중 봉기는 프랑스군의 총칼 앞에 실패로 끝이 납니다. 이튿날인 5월 3일 밤 프랑스군은 폭동에 가담했던 자들에 무자비한 복수의 학살을 벌이기 시작합니다. 학살의 희생자들은 봉기와 무관한,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시민이나 가족·연인·친구의 안부가 걱정돼 집밖으로 잠시 나온 시민들이 대부분이었죠.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3일’
프란시스코 고야의 작품 ‘1808년 5월 3일’


그렇게 시민들은 마드리드 외곽에 있는 프린시페 피오언덕으로 끌려가 총살당하게 됩니다. 좌측 하단으로는 이미 학살당한 시민들의 시체가 널브러져 있고, 그 위로는 수도사 복장을 한 남성이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절망에 빠져 손으로 귀와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돌리며 울부짖는 사람들 가운데 흰 셔츠를 입은 남성은 양팔을 벌려 보이며 잔혹한 이 학살 속에서 무어라 외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성흔이 보이네요. 죽은 예수처럼 이들은 죄가 없고 이들의 희생으로 다시 마드리드에 평화가 오게 될 것이라는 고야의 바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측으로는 학살을 자행하는 프랑스군의 모습이 보이는데요. 고야는 이들을 일렬로 세우고 얼굴을 가려 등만 보이게 함으로써 인간성이 상실된 잔혹한 현장의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고 있네요. 훗날 이 작품에 영향을 받은 마네와 피카소는 학살당하는 자와 맞은편에 일렬로 서있는 학살자의 구도에 착안해 걸작을 남기기도 합니다. 마네의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 피카소의 ‘한국에서의 학살’ 등이 대표적이죠. 또한 피카소는 두 작품에 영감을 얻어 소피아 미술관에서 확인해 볼 위대한 걸작 ‘게르니카’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필자 이창용은 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로마 바티칸 박물관,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에서 도슨트로 활동했다. 『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 시리즈의 저자.
필자 이창용은 홍익대학교 문화예술경영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로마 바티칸 박물관,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에서 도슨트로 활동했다. 『미술관을 빌려드립니다』 시리즈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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