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성 없는 전쟁…국가 외교·안보가 위협받는다

입력 2023. 03. 17   17:33
업데이트 2023. 03. 20   1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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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그들이 온다 - 정보전의 현실과 방첩의 이해

‘영향력 공작’ 커다란 위협으로 부각
러시아의 미국 대선 여론 개입 등
첨단기술 동원 해킹·심리전 노출
민주주의 체제 자체 침해 가능성
외국 정보활동 대응하는 방첩활동
국민적 인식 전환·역량 강화 필요


최근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스파이 사건이 급증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스파이 사건들이 발생해 ‘스파이의 시대(Decade of Spy)’라고 불렸던 냉전 말기 1980년대를 연상시킬 정도입니다. 이에 최근 발생한 스파이 사건들을 분석해 ‘방첩’과 ‘스파이’에 관한 독자들의 인식을 새롭게 할 기획 시리즈를 선보입니다.

모든 국가는 자국의 생존과 이익을 위해 정보활동(Intelligence)을, 자국에 대한 다른 나라의 정보활동에 대응하기 위해 방첩활동(Counterintelligence)을 한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강국으로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날로 높아져 가는 우리나라를 대상으로 한 외국의 정보활동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각국의 수많은 스파이들이 우리와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우리를 상대로 치열하게 정보활동을 하고 있다고 간주해도 틀리지 않다.

상황이 이런데도 방첩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아직도 간첩은 북한에서만 오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반공방첩’ 표어가 익숙하던 시절의 수준에 머물고 있다. 특히 남북관계 변화에 따라 경각심이 더욱 무뎌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는 어엿한 국제사회의 주요 국가로서 위상에 맞는 수준의 정보전에 대한 국민적 인식이 필요하다.

우리에 대한 정보적 위협은 북한뿐만 아니라 우방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로부터 오는 것이며, 상시적으로 존재한다. 우리의 국력 신장과 국제적 위상 강화는 반가운 일이나 이에 따른 외국의 정보활동 강화는 피할 수 없이 수반되는 일종의 비용이며, 그만큼 커진 정보적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방첩에 대한 국민적 인식 전환과 방첩 역량 강화가 필요하다.

정보전의 진화와 민주주의의 위기

자국의 생존과 이익을 위한 정보활동에는 단순한 첩보 수집만이 아니라 암살, 파괴, 선전선동, 사보타주 등을 포함한 다양한 수단이 동원된다. 최근에는 상대국의 정책이 자국에 유리한 방향으로 추진되게 하거나, 자국에 우호적인 여론이 형성되도록 조작하기 위한 소위 영향력 공작(Influence Operation)이 커다란 위협으로 부각되고 있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러시아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특정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첨단 기술을 동원한 해킹과 사이버 공간을 활용한 여론 조작을 한 것이 대표적이다. 당시 오바마 대통령은 러시아 외교관 35명을 추방하고, 러시아 정보기관인 FSB(러시아 연방보안국)와 GRU(러시아연방군 총참모부 정보총국)의 미국 내 자산을 동결하는 등 강력하게 대응했다.

이후 미국 DNI(국가정보국)가 러시아 정보기관의 구체적 개입 사실을 확인한 보고서를 제출하고, 뮬러 특검의 조사를 통해서도 러시아 개입 사실이 확인됐으나 상황을 바꿀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또한 2020년 미국 대선 직전에도 DNI와 FBI(미국 연방수사국)는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와 이란이 미국 대선 여론에 개입하고 있다”고 경고한 바 있다.

이러한 종류의 영향력 공작은 여론에 의한 정치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일방적으로 불리한 비대칭 정보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과거의 단순한 선전선동이나 심리전과는 달리 해킹을 통한 정보의 유출과 인터넷 활동 성향 분석(Psychographic Profiling) 등을 통한 개인 맞춤형(Microtargeting) 선전선동술 등 첨단 기술이 동원된 심리전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해킹과 사이버공작 역량에서 러시아에 뒤지지 않고, 더 호전적인 북한과 대치하는 우리나라도 절대 예외적 상황이 아니다.

2022년 1월 영국 국내 정보기관인 MI5(보안국)는 “중국 공산당 통일전선부와 연계된 중국계 변호사 크리스틴 칭 키 리(Christine Ching Kui Lee)가 고액의 정치자금 기부를 빌미로 영국 정계에서 중국을 위한 영향력 공작(Influence Operation)을 하고 있다”며 경고했다.

리 변호사는 영국 유력 의원들과 교류하며 고액 정치 헌금을 제공하고 테레사 메이,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등과 함께 사진을 찍는 등 영국 정계에서 15년 동안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영국 내 화교들에게 투표 참가를 권장하는 등 영국 내에서 중국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한 많은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이에 대해 영국 내에서는 미국의 ‘외국대리인등록법(Foreign Agent Registration Act)’과 같이 외국을 위한 이러한 종류의 활동을 사전에 등록하도록 의무화하기 위한 법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정계, 학계, 언론계 등 사회 지도층을 대상으로 하는 외국의 영향력 공작에 무방비로 노출돼 이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고 관련 법 제도를 마련하는 등 대응책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정보활동은 범죄가 아니라 전쟁

정보활동은 일반적 국가 행정 행위와는 다른 ‘특별한 국가적 목적’을 수행하기 위한 ‘특별한 국가 행위’다. 다른 국가기관과 달리 예외적으로 정보기관에 대해서만 조직이나 활동의 비밀성을 인정하고 있는 것도 그러한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민주국가에 있어서 모든 국가기관의 행위는 공개되는 것이 원칙이다. 비밀 활동을 용인할 경우 감시에서 벗어나 권한이 남용될 소지가 다분하고, 민주주의 자체를 침해할 위험성이 매우 크다. 그런데도 모든 국가는 왜 예외 없이 이런 활동을 인정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정보기관이 군대와 마찬가지로 외부의 적대세력으로부터 국가의 생존을 지켜내는 절대적인 임무를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국가가 막대한 정부 예산으로 무기를 구매하고, 공무원(군인)들에게 인명 살상 방법을 훈련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다. 인류가 만든 가장 큰 공동체인 국가는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구성원들인 국민과 국가 스스로의 생존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극단적 방법도 동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외국의 정보활동에 대응하는 방첩활동은 외국 스파이가 자국의 법을 어긴 범죄자이기 때문에 이들을 처벌하기 위해 수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의도를 파악해 위협에 대비하고, 상대의 전략을 알아내고자 하는 정보활동의 일환이다. 이를 위해서는 상대 정보기관에 대한 우리 스파이의 침투, 이중 스파이 활용, 적의 잘못된 판단을 유도하는 기만 등 고도의 공작활동이 수반되는 것이다.

요컨대 방첩활동은 평시에 이뤄지는 ‘국가 간의 총성 없는 전쟁(Silent Warfare)’으로 인식돼야 하며, 범죄의 수사나 범인의 체포와 같은 형사사법 기능으로 취급돼서는 안 된다. 우리가 흔히 모범적인 정보기관으로 거론하는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표방하는 “기만으로 전쟁을 수행한다(By way of deception, thou shalt do war)”는 말은 이러한 정보활동의 성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전략적 방첩활동의 필요성

외국의 정보적 위협은 고도의 비밀성을 유지하며 은밀히 추진되는 것이기에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모든 국가들이 많은 인력과 예산을 들여 정보기관을 운용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바로 우리가 방첩을 중요시해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방첩은 상대의 정보활동을 단순하게 막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정보활동을 통해 상대국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핵심적 정보활동으로 인식해야 한다. 이를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수집과 분석 및 장기적 공작수행 체계도 갖춰야 한다.

또한 주적이 누구인지, 구체적 위협은 어떤 것인지 등을 미리 분석·예측하고 선택과 집중을 통한 효율적 자원 배분을 통해 최선의 방안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를 위해 다른 모든 국가기관과의 체계적인 협조도 필요하다. 미국은 17개 정보기관을 통할하는 DNI 산하에 방첩 업무를 전담하는 NCSC(국가방첩보안센터)를 둬 정보기관뿐만 아니라 모든 정부부처가 협력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는 점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요컨대 방첩은 스파이를 잡아내는 단순한 활동이 아니라 국가의 외교·안보 전략을 추진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인정받고,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활용돼야 한다.

필자 배정석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국가정보원에서 방첩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 국제정보사학회와 한국국가정보학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필자 배정석 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 겸임교수는 국가정보원에서 방첩업무를 담당했으며 현재 국제정보사학회와 한국국가정보학회 정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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