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동맹을 말하다] ⑤ 알레이 버크 제독의 ‘한국인 아들’ 박찬극 예비역 제독

입력 2023. 03. 19   17:29
업데이트 2023. 08. 1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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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기획-한미동맹을 말하다 
⑤ 알레이 버크 제독의 ‘한국인 아들’ 박찬극 예비역 제독 

6·25전쟁 때 맺은 소중한 인연, 해군 발전에 귀중한 자산으로…


해군 중위였던 1951년 6월 미 로스앤젤레스함 파견 

버크 제독·맥팔레인 함장 휘하서 선진 무기체계 경험 
‘천측 항해’ 실전 활용법 선보이자 미 승조원들 깜짝

1967년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 재임 땐 천금 같은 도움
한국 해군, 미 구축함 추가 도입 상원 반대로 좌초 위기
두 은인 인맥 통해 설득…서울함·부산함 가질 수 있게 돼


1950~1960년대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해군의 미 해군 구축함 도입에 기여한 박찬극 예비역 제독이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자택에서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1950~1960년대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해군의 미 해군 구축함 도입에 기여한 박찬극 예비역 제독이 지난 9일 서울 강남구 자택에서 당시의 상황을 회고하고 있다.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6월 미 해군 순양함 로스앤젤레스함에 우리 해군중위가 연락장교로 파견됐다. 당돌하고 유능했던 그는 미 해군 함정에서 실습할 기회를 얻었다. 서툰 영어에도 고군분투하는 그 모습을 본 미 해군 제독 입가엔 미소가 번졌다. 신생 국가 대한민국의 희망을 엿봤기 때문일까. 그로부터 9년 뒤 두 사람은 미국에서 재회했다. 제독은 미 해군참모총장이 돼 있었다. 참모총장은 주위 사람에게 한국인 장교를 이렇게 소개했다. ‘내 한국인 아들’이라고. 박찬극 예비역 제독과 미 해군의 ‘전설’ 알레이 버크(Arleigh Burke) 제독의 이야기다. 글=이원준/사진=양동욱 기자

천측 항해로 눈길…함께 미 가자는 제안도

72년 전 미 해군 함정에서 연락장교 임무를 수행한 98세 노병의 얼굴에는 당시 추억이 떠오른 듯 미소가 가득했다. 알레이 버크 제독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주인공은 박찬극(1976년 준장 예편) 예비역 제독. 그는 홀로 38선을 넘어와 1947년 9월 해군사관학교 3기생으로 입학했고, 1950년 2월 소위로 임관했다. 그리고 금강산함(PC-702) 항해사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박 제독은 금강산함 일원으로 인천상륙작전과 영흥도·덕적도 탈환작전 등에 참전한 뒤 1951년 연락장교로 로스앤젤레스함에 파견됐다. 당시 함정에는 미 해군5순양함분대사령관(소장)이던 버크 제독이 있었다. 박 제독은 ‘천측 항해’를 해본 경험으로 미 승조원들 눈에 띌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6·25전쟁 발발 직전 미국에서 금강산함을 인수해왔습니다. 당시 함정에 레이다가 없어 함정 위치를 파악하려면 별을 봐야 했습니다. 사관생도 시절 배운 천측 항해를 실전에 활용해 태평양을 건넜죠. 로스앤젤레스함에서 실습할 때도 제가 별을 관측하니, 어떻게 배운 거냐고 묻더군요. 한국 해군이 제대로 된 천측을 해서 놀라는 분위기였습니다.”

박 제독이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 속에서 맥팔레인 함장의 부인을 가리키며 이야기 하고 있다.
박 제독이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 속에서 맥팔레인 함장의 부인을 가리키며 이야기 하고 있다.

 

맥팔레인 함장의 아내가 박 제독에게 보낸 편지.
맥팔레인 함장의 아내가 박 제독에게 보낸 편지.


박 제독은 이후 로스앤젤레스함 각 부서에서 실습하며 선진 무기체계를 직접 보고 배웠다. 2개월이었던 연락장교 근무 기간도 6개월로 늘었다. 버크 제독을 포함한 지휘부가 우리 해군에 요청했기 때문이라고 박 제독은 기억했다. 로스앤젤레스함이 임무를 마치고 돌아갈 때가 되자 함정에 그대로 남아 미국에서 군사유학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도 받았다.

“원래 두 달 뒤에 후임자와 교대했어야 했는데, 버크 제독의 배려로 6개월간 실습하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덕분에 함정 구석구석에서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실습 기간이 끝날쯤 로스앤젤레스함은 임무교대를 위해 미 본토로 향해야 했습니다. 함께 미국에 가자는 제안을 받았고, 우리 해군에서도 허가가 났지만 제가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는데 홀로 어떻게 떠나냐고 당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께 말씀드렸습니다. 로버트 맥팔레인(Robert McFarlane) 함장을 비롯한 승조원들이 아쉬워했던 모습이 선합니다.”

박 제독 부부와 버크 제독 부부가 함께 찍은 기념사진.
박 제독 부부와 버크 제독 부부가 함께 찍은 기념사진.

 

박 제독의 자택에 늘어선 미국 군사외교 활동 당시 사진들.
박 제독의 자택에 늘어선 미국 군사외교 활동 당시 사진들.


‘한국인 아들’로 소개…구축함 도입에도 힘 보태

그렇게 로스앤젤레스함을 떠나보낸 박 제독은 1960년 다시 버크 제독을 만나게 된다. 중령 시절 인사관리과정의 하나로 미국 유학길에 오르면서다. 버크 제독은 그사이 소장에서 대장으로 진급해 미 해군참모총장으로 3번째 임기를 수행하고 있을 때였다.

“한번은 버크 제독이 미 해군 장성 진급자 축하 파티에 저를 초청했습니다. 그는 저를 데리고 다니면서 손님들에게 ‘한국인 아들’이라 소개했습니다. 한국 해군중령이 귀빈과 별들 사이에서 인사를 나눈 것이죠. 미국인이 아닌 외국인은 제가 유일했습니다. 수년 뒤 미 해군대학 과정 중에는 맥팔레인 함장과도 만나 왕성히 교류했습니다. 특히 졸업식 때가 기억납니다. 자동차로 8시간 걸리는 거리를 부인, 둘째 딸과 함께 와서 축하해줬습니다.”

박 제독이 버크 제독, 맥팔레인 함장과 쌓은 인연은 우리나라에 귀중한 자산이 됐다. 1967년 그가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으로 재임하던 때 우리 해군은 큰 위기를 맞았다. 해군은 전력증강계획의 하나로 1963년 미 해군의 플레처급 구축함 1척을 도입한 뒤 추가 도입을 추진했지만 미 상원 반대에 부딪히면서 계획이 좌초될 위기였기 때문이다.

“난감했습니다. 무관으로 부임한 지 20일쯤 됐을 때인데, 한국에서는 왜 부결된 거냐고 난리가 났죠. 그런데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일개 해군대령이 어떻게 미 상·하원 의원을 만나 로비한답니까.”

난처한 박 제독, 위기에 빠진 한국 해군에 버크 제독과 맥팔레인 함장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맥팔레인 함장은 예편 후 미 군수공업협회 회장으로 일하며 정계에 넓은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다. 버크 제독은 미 해군의 전설적 존재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두 분의 도움으로 주요 상원의원 보좌관을 만나 한국 해군의 입장을 전달했습니다. 왜 한국에 구축함이 필요한지를 상세히 설명했습니다. 특히 대간첩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최대 속력 38노트(시속 약 70㎞)의 플레처급 구축함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박 제독의 노력과 진심은 통했다. 그해 미 상원은 구축함 1척을 제공하는 기존 계획보다 늘어난 총 2척을 우리 해군에 양도하기로 결정했다. 충무급 구축함 2번함 서울함(DD-92)과 3번함 부산함(DD-93)이 그 주인공이다. 충무급 구축함 3척은 1980년대 후반까지 동·서·남해에서 해양주권 수호의 핵심 전력으로 활약했다.

한미동맹은 든든한 힘

박 제독은 5해역사령관을 마지막으로 군복을 벗었지만 ‘미국의 아버지’ 버크 제독과 서신을 교환하며 교류를 이어갔다. 버크 제독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편지를 받고선 미국에 날아가기도 했다. 버크 제독은 1996년 94세 일기를 끝으로 눈을 감았다.

한국인 아들과 미국인 아버지, 두 사람의 이야기는 한미동맹의 역사와도 같다. 인터뷰 말미 박 제독에게 한미동맹의 중요성을 질문했다. 신임 장교로서 6·25전쟁을 생생히 겪은 그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나라의 적은 북한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동맹국 미국은 북한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6·25전쟁에서 우리는 미국의 힘을 빌렸습니다. 미국이 우리나라를 지켜준 결과 지금 이렇게 우리가 스스로를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저에게 한미동맹은 든든한 힘입니다.”


각별한 ‘한국 사랑’…해참총장 시절 함정 32척 대여 결단

알레이 버크 제독은?

미 해군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로 해군참모총장을 3연임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미 해군은 1991년 이지스 구축함 1번함의 함명을 ‘알레이 버크함’으로 명명할 정도로 존경을 표하고 있다. 미 해군 역사상 생존 인물의 이름을 함명으로 제정한 것은 버크 제독이 처음이다.

그는 6·25전쟁 때 5순양함분대사령관으로 동해작전에 참전했으며, 정전 이후에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에도 이바지했다.

버트 제독의 ‘한국 사랑’은 유별나다. 1955년 8월부터 61년 8월까지 미 해군참모총장 재임 시절 ‘미국 해군 함정 대여에 관한 한미협정’을 토대로 경비함·구축함·상륙함 등 함정 32척을 우리 해군에 대여하는 결단을 내렸다.

1967년 10월 한국 해군의 구축함 도입에 관한 함정 대여 법안이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부결되자 예비역 신분이던 버크 제독은 구축함 2척이 한국 해군에 인도될 수 있도록 도왔다.

버크 제독은 한국 해군사관학교와 각별한 인연이 있다. 1951년 초 해사 방문에서 열악한 도서관을 보고 미 해군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US Naval Institute Proceeding’(1951년 6월호)에 도서기증을 호소하는 글을 기고했다. 이후 2만여 권의 도서를 모아 기증하는 등 생도 교육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버크 제독이 네 번이나 방문한 해군사관학교에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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