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신영 조명탄] 모호함이 즐거운 이유

입력 2021. 07. 23   16:28
업데이트 2021. 07. 23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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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신 영 
생각학교ASK 대표
조 신 영 생각학교ASK 대표


생각하는 사람을 ‘싱커(thinker)’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는 갈급한 사람이다. 지적 허기와 목마름에 신음하는 존재다. 살기 위해 부지런히 찾아 읽는다. 시간을 쪼개 무엇이든 쓴다. 메모든, 에세이든, 일기든 호모 롸이트쿠스(방금 지어낸 단어지만)로 살아간다. ‘싱커’는 책을 혼자 읽지 않는다. 책 동지들이 주위에 네댓 있게 마련이다. 텍스트를 함께 읽고 고민하며 탐구한다. 책으로 연대한다. 주로 모호하고 어려운 책을 정해 함께 읽는다.

2002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대니얼 카너먼 프린스턴대학 교수는 ‘싱커’의 생활 패턴에 관심이 많다. 자신의 대표작 『생각에 관한 생각(Thinking - Fast and Slow)』에서 두 가지 시스템을 언급한다.

하나는 크게 노력이 필요하지 않은 생각 시스템이다. 밥 먹고, 양치하고, 일상 업무를 처리하는 데 필요한 것으로 거의 자동화된 생각 시스템이다. 순식간에 판단해 결정하고 언어와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방식으로 이를 ‘시스템 원(one)’이라고 부른다. ‘패스트 싱킹(Fast Thinking)’이다.

‘시스템 투(two)’는 우리를 자주 멈추게 하는 생각 시스템이다. 골치 아픈 난제를 만나거나, 모호하고 애매한 상황에서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고민에 빠지기 시작할 때 저절로 작동하는 생각 시스템, 즉 ‘슬로 싱킹(Slow Thinking)’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시스템 원’에 머물고 싶은 본성을 갖는다. ‘시스템 투’는 고통이 따르고 불확실하며 두렵기 때문이다. 저절로 구축할 수도 없다. 마치 악기를 배우거나 특별한 기술을 익힐 때처럼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하고 에너지를 쏟아부어야 조금씩 발전한다.

책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자면, 내가 책을 좋아하고 많이 읽는 독서가라고 저절로 시스템 투가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쉬운 책, 흥미로운 줄거리 중심의 책, 명료하고 분명한 해답을 제시하는 실용서는 ‘시스템 원’에 머무는 책이다. 느린 방식으로 천천히, 모호함을 파헤치며 탐구하는 데 필요한 책, ‘시스템 투’를 자극하는 책은 고전이다.

‘싱커’는 겹(layer)이 풍요로운 책을 좋아한다. 한 문장을 읽으면 호흡이 절로 멈추고 곰곰이 뜻을 생각하게 만드는 책, 필사하거나 그 문장에 관한 견해를 글로 써 끼적이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이다.

문학 작품은 어떤 유용성이 있을까? 시스템 원 편향적 사고로는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어렵다. 좋은 문학이 갖는 상징성, 모호함은 생각 ‘시스템 투’를 강렬하게 자극한다. 감각에 머물지 않도록 내 생각을 흔들어 깨우며 우리 영혼에 보약 같은 역할을 해 준다.

현대 사회는 대중을 감각으로 길들인다. 시스템 원에 머물고 싶은 대중심리를 이용한다. 대중이 깨어나 ‘시스템 투’로 넘어가 자신의 생각을 깨우지 못하도록 편리함과 깔끔함, 명료한 완성품으로 우리를 지배한다.

‘시스템 원’에만 머물면 비슷한 메뉴와 패스트푸드로 끼니를 때우는 부실한 식사처럼 영혼이 허약해질 수 있다. 반면, ‘시스템 투’를 잘 가꾼 지혜로운 ‘싱커’는 매 끼니 세계 최고 수준의 일류 요리사가 제공하는 풍요롭고 다양한 영혼의 산해진미를 누리며 살아간다. 삶이 무르익을수록 더 깊고 진한, 생의 아름다움을 품으며 주위를 밝힌다.

‘싱커’는 ‘시스템 원’으로 만족할 수 없는 지적 호기심과 욕구가 충만한 종족이다. 밤하늘 별처럼 무수히 많은 인류의 위대한 작품을 찾아 헤매며 읽는다. 아무리 퍼내 나누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지적 허기를 적셔주고 삶을 별처럼 빛나게 해 줄 고전이라는 벗과 함께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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