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확인 지뢰 많아 안전 특히 주의
기존 교각 보수 활용·임시 목교 철거
유속 빨라 정지작업에 어려움 겪어
보름 만에 완성…뛰어난 기술력 확인
지역 책임자 만나 우리 군 뜻 전하고
부대 대표해 중대장 이름 넣자고 제안
흔쾌히 허락…첫 복구 교량 의미 더해
1995년 10월부터 이듬해 12월까지 총 3진에 걸친 앙골라 공병부대의 유엔 평화유지활동(PKO)으로 현지에는 8개의 교량이 복구됐다. 또 공항, 학교, 도로 등 주요 시설에 대한 공병 작전을 통해 내전으로 파괴된 도시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아울러 다양하고 지속적인 대민 지원 활동은 감동과 신뢰를 만들었다. 공병부대는 현지 주민들에게 친구 같은 존재였다.
앙골라 공병부대 1진이 첫 번째로 복구한 교량은 1995년 12월 2일 준공식을 가진 치피파(Chipipa)교였다. 주둔지였던 우암보에서 북쪽으로 약 40㎞에 위치해 중·서부지역 도로를 연결하고, 아래로는 카론쿠에(Caronque) 강이 흐르고 있다. 다리는 우암보 일대를 점령한 반군이 동부지역으로 철수할 때 파괴돼 방치되고 있었다.
천영택 예비역 대령(당시 중령)은 당시 공병부대장으로서 치피파교 복구를 주도했다. 앙골라 전개 후 첫 번째 교량 복구였던 만큼 안전사항이나 진행 상황을 꼼꼼하게 챙겼다. 사전 현지 정찰을 통해 교량의 제원을 측량하고 협조 회의를 이어가며 안전대책, 공사계획, 복구계획을 세웠다.
“생각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않았어요. 안전이 가장 큰 걱정이었어요. 주변 미확인 지뢰 지대에 철조망을 설치하고 출입금지 표지를 부착했습니다. 교량 폭파와 철거도 필요했기에 각별히 신경 썼고요. 처음부터 어려운 상대를 만난 것이었지요.”
공법도 문제였다. 공사는 교량 초입의 취약성을 고려해 이 부분을 연장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기존 교각을 보수해 활용하되 잔해는 파괴하고 임시 목교는 철거했다. 아울러 교량 복구와 동시에 도로보수 작업을 하기로 했다. 공사는 약 보름간 진행됐다. 약 100명의 장병이 참여했으며 장갑차, 굴착기, 지게차, 유압크레인, 발전기, 유조차, 급수차, 트럭 약 20대 등이 투입됐다.
“교량이 길어지면 통과 하중이 낮아지기에 교각을 설치해야 하는데, 콘크리트 교각을 세우려니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게 문제였어요. 우기라 강물도 꽤 불어나 있었고요. 그래서 조립교 형태의 교각을 만드는데 이번에는 강물의 빠른 유속이 걸림돌이었습니다. 정지 작업에 어려움이 제일 컸습니다.”
힘든 작업이었다. 첫 과제였기에 부담도 컸다. 하지만 부대는 차근차근 공사를 이어갔다. 하나하나 어려움을 헤쳐나갔다. 교량은 공정 일정에 따라 복구를 마쳤다. 최대 하중 55톤, 길이 54m의 조립교로 완성된 다리는 약 13㎞의 우회도로 이동 시간을 크게 단축하며 앙골라 서해안 도시를 빠르게 연결했다.
“현지 유엔임무단 관계자들이 깜짝 놀랐던 게 기억납니다. 위험한 여건에서 그렇게 빨리 그것도 아주 깔끔하게 교량을 복구한 것을 보며 혀를 내둘렀어요. 첫 과업인 만큼 우리 군 공병기술의 우수성을 보여주려고 노력했는데 결과가 좋아서 뿌듯했습니다. 그 교량을 절대 잊지 못해요.”
당시 천 중령은 부대원들의 고생이 안쓰러웠다. 열악한 조건을 극복하며 최선을 다해줬던 부대원들이 고마웠다. 그중 공사를 주도했던 공병중대장의 노고를 다른 이들과 함께 기억하고 싶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교량 명칭이었다. 다리 이름에 공병중대장의 이름을 넣고자 했던 것. 지역 책임자를 만나 이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그간의 우리 군의 노력을 설명하고 양국의 우호 증진을 위한 좋은 기회라는 점을 강조했다.
“우리나라도 리빙스턴교처럼 6·25전쟁 당시 파괴된 다리를 복구한 미군 공병의 이름을 따서 명칭을 부여했잖습니까? 앙골라 주민들이 우리 부대를 또 우리나라를 오래도록 기억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리빙스턴교는 미 10군단 소속 리빙스턴 소위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 1951년 6월 인제지구전투에 참가한 리빙스턴 소위와 부대원들은 작전상 후퇴하던 중 인제군 북부를 동서로 가르는 인북천을 만났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서 강물이 범람했고, 부대원 대부분이 도하 중 거센 물살과 총탄 세례에 전사했다. 리빙스턴 소위 역시 이때 전사했는데, 임종 직전 “이곳에 다리가 있었다면 많은 희생이 없었을 것”이라며 고국의 가족에게 “사재를 내어서라도 교량을 지어달라”고 유언했다. 휴전 후 1957년 12월 그의 가족은 이곳에 다리를 준공했고, 리빙스턴교로 불리게 됐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공병중대장이 고생을 참 많이 했습니다. 부대를 대표해 중대장 이름을 따서 교량을 명명하자는 의견을 전했는데 현지 책임자가 흔쾌히 허락했어요.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동의했습니다. 우리의 뜻을 이해하고 나아가 첫 복구 교량이라는 의미를 더한 것이었지요.”
그래서 붙여진 교량명은 ‘한승 브릿지(Bridge)’. 한승은 당시 부대 공병중대장이었던 강한승 대위(현재 예비역 대령) 이름이다. 알루미늄으로 표지석도 만들어 복구 배경과 공사 기간·방법 등 교량 복구에 관한 설명도 달았다. 또 이 다리가 앞으로 앙골라의 평화와 번영이 싹트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며 양국 우호 증진을 기원했다.
“앙골라 공병부대원들은 열악한 상황에 맞서 일치단결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갔습니다. 놀라운 성과를 이뤄내며 아프리카 땅에 한국의 우수함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그곳에서 싹을 틔우고 끈기 있게 자라 묵묵히 우리나라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고 여전히 믿고 있습니다.” 서현우 기자/사진 제공·도움말=군사편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