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불붙인 허수아비 연 띄워 ‘비담의 반란’ 제압

입력 2021. 02. 24   15:36
업데이트 2021. 02. 24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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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포화연양과 전술연등
 
불을 매달아 연을 날리다
 
군영에 유성 떨어져 위기감 퍼지자
“별 다시 하늘로 올랐다” 심리전 펴
 
제주도 ‘목호의 난’ 일어났을 때
최영 장군, 절벽 위 향해 화공작전

 
김시민 장군, 불 밝힌 ‘등 뗏목’ 띄워
남강으로 야간 침투 왜군 저지도


김유신은 월성에서 연에 불을 붙여 명활산성 위로 날리며 비담의 반란군을 심리전으로 진압했다.  필자 제공 (일러스트 한가영)
김유신은 월성에서 연에 불을 붙여 명활산성 위로 날리며 비담의 반란군을 심리전으로 진압했다. 필자 제공 (일러스트 한가영)

정월 대보름 달맞이 준비가 한창이다. 낮에는 겨우내 띄우던 연을 날려 보내고 밤에는 달집을 태웠다. 한 해 나쁜 액을 멀리하고 좋은 복을 기원(送厄迎福)하기 위해서였다. 연과 달집은 전장에서 반란군과 침략자를 물리치는 전술비연과 유등으로 진화했다.


연에 불을 매달아 반란 진압

647년 통일신라 진덕여왕 때 비담과 염종이 반란을 일으켰다. 김유신은 연을 ‘포화연양’ 기만책으로 사용해서 반란을 진압했다. 『삼국사기』의 ‘열전’에 김유신이 ‘허수아비를 만들어(乃造偶人·내조우인) 불을 붙이고 연에 실어 날려(抱火載於風鳶而양之·포화재어풍연이양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했다(若上天然·약상천연)’라고 나온다. 연에 불을 밝혀 하늘에 띄운 연등(鳶燈)이었다. 연(鳶)은 솔개가 공중에서 날개를 펴고 빙빙 도는 모습에서 바람을 타는 연을 떠올린 글자다. 심리전과 임기응변에 활용되는 사자성어다.

김유신은 쿠데타 진압을 위해 경주 서쪽 월성에 군영을 차렸다. 비담의 반란군은 4㎞ 맞은편 동쪽 명활산성에서 서로 대치했다. 며칠 뒤 한밤중에 월성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 비담 측은 진덕여왕이 크게 패해 망할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김유신 측은 심리적으로 위기에 몰렸다. 김유신은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이고 커다란 연에 매달아 날려 보냈다. 마치 지난밤 떨어진 큰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는 떨어졌던 별이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을 전파시켰다.

김유신 측은 패배 불안감이 사라졌고 비담 측 사기는 떨어졌다. 그는 흰 말을 타고 큰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올렸다. 신하가 왕을 없애려는 것은 천벌을 받는다고 외치며 반격에 나서 비담의 반란을 진압했다. 김유신이 위기를 기회로 재빠르게 대응한 일종의 심리전이었다.


화공연으로 몽골 오랑캐 토벌

연은 여러 전투 수단으로 활용됐다. 제주도 서쪽 애월 해변 비석에 ‘애월읍경(涯月邑境)은 항몽멸호(亢蒙滅胡)의 땅’이라고 적혀 있고 그 옆에 최영 장군 석상이 있다. 그는 고려 말 명장으로 제주도 ‘목호의 난’을 진압했다. 목호(牧胡)는 ‘말을 기르는 오랑캐’라는 뜻이다. 고려는 몽골에 굴복한 뒤 원나라 지배를 오래도록 받았다. 이때 원나라는 제주도를 일본 정벌 전초기지로 삼아 전선을 제조하고 말을 길렀다.

19세기 중엽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의 ‘정월·보름날(上元)’ 편에 “고려 말 최영 장군이 탐라를 정벌할 때 연을 이용해 사방이 절벽인 섬에 상륙했다는 전설이 있다(諺傳昉自 崔瑩伐耽羅之 役國俗至今行之·언전방자 최영벌탐라지 역국속지금행지)”라고 나온다. 이 책은 1년 중 계절에 따른 민속 행사들을 기록했다. 명나라 주원장은 원나라를 밀어내고 중국 중원을 차지한 뒤 공민왕에게 말 2000마리를 보내라고 했다. 제주 목호 홀고탁 등 1500명은 거세게 저항했다.

1374년 최영의 목호 정벌군 2만5600명은 전함 314척으로 한림 명월포에 상륙해 목호를 토벌했다. 이들 잔여 병력은 서귀포 남쪽 범섬으로 옮겨 최후 저항을 했다. 범섬은 높이 84m 절벽으로 접근이 쉽지 않았다.

최영은 연에 불을 붙여 절벽 위 갈대숲에 화공 작전을 펼쳤다. 오늘날 자폭용 드론이었다. 목호들은 식량과 식수가 고갈되자 절벽 아래로 떨어져 저항을 끝냈다. 이때 사용한 연이 전술비연(戰術秘鳶)의 시초이며, 비는 ‘숨길 비(秘)’로 암호수단을 말한다. 이순신 장군은 이 연들을 경남 고성과 통영 앞바다 해전에서 지휘통신 수단으로 사용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유등으로 왜군 침투 저지

달집은 강물에 띄운 유등(流燈)으로 발전했다. 등(燈)은 불 화(火)와 오를 등(登)이 합쳐져 ‘높은 곳에 올려져 주변을 밝힌다’라는 의미이다. 연등(燃燈)은 줄에 매단 등이며 연(燃)은 ‘불 화(火)와 그러할 연(然)이 결합해 불에 그슬리다’라는 뜻이다. 풍등(風燈)은 연줄 없이 바람에 날려 보내는 등이다.

1592년 10월 진주성에서 김시민 장군 등 3800명은 왜군 2만여 명과 싸웠다. 왜군들은 남쪽 남강으로 야간 침투를 시도했다. 이때 불을 밝힌 등을 묶은 뗏목을 띄워 공격을 저지했다. 오늘날 수상 조명등이다. 당시는 조적등(照敵燈·적을 조명하는 등)이라 했다.

다른 유래는 아버지가 전투에 투입되며 아들에게 “강에 등불을 띄워 소식을 전하마”라고 했다고 전해진다. 아버지는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아들은 아버지처럼 등을 강물에 띄웠다. 그 후 남강에는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그리움을 담은 등을 하나둘 띄우기 시작했다.

현재 해마다 진주성 전투가 있었던 10월에는 가족 건강과 평화를 염원하는 등을 띄운다. 남강유등축제다. 전투 때 순절한 호국영령의 애국혼을 기리는 추모식이자 평화 염원 기념식이다. 지금은 많은 지역에서 유등 축제를 열고 있다.

연과 유등을 이용해서 승리했던 김유신과 최영 및 김시민 장군에게서 전투 지략을 배운다. 전장 상황에 맞는 창의적 전투 기술과 병력 운용으로 승리했다. 포화연양의 연과 유등처럼 유연한 생각의 깊이를 더해가자.

<오홍국 국제정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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