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중동전쟁 당시 시민 항전 전시물 인상적

입력 2021. 02. 24   15:46
업데이트 2021. 02. 24   15:47
0 댓글
<7> 이집트 ⑤

나세르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촉발
이스라엘 전격전에 英·佛 군사 개입
지중해 연안 포트사이트 초토화돼
소총·농기구 대항 군사박물관에 전시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촉발된 2차 중동전쟁 당시 포트사이드 근교에 낙하하는 영국·프랑스 공수부대원과 시민군의 전투장면을 담은 그림. 
 필자 제공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촉발된 2차 중동전쟁 당시 포트사이드 근교에 낙하하는 영국·프랑스 공수부대원과 시민군의 전투장면을 담은 그림. 필자 제공

포트사이드(Port Side)는 지중해 연안 항구로 수에즈운하 북단 출발점이다. 인구 50만의 이 도시는 세계 물류 이동 해상로의 요지로, 거리도 깨끗하며 한결 여유로운 분위기를 풍긴다. 하루 100여 척 선박의 운하통행료는 이집트의 돈줄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전략적 중요성으로 인해 제 2·3·4차 중동전쟁에서 반복적으로 도시가 초토화되는 뼈아픈 역사를 경험하였다.

맨발 청춘들의 뜨거운 축구 열정

망망대해 지중해를 끼고 있는 포트사이드 백사장. 딱딱한 모랫바닥과 작은 자갈이 널려 있는 바닷가에서는 조기 축구팀 시합이 한창이다. 임시 골대와 몇 개의 의자로 라인이 표시된 간이운동장이다. 공이 발에 붙어 다닐 정도로 선수들의 개인기는 출중했고 축구 열정 또한 뜨겁다.

공격수의 단독 드리블을 수비수가 슬쩍 몸으로 밀었다. 운동경기 중 흔한 일이다. 자빠진 선수가 벌떡 일어나 거칠게 항의하면서 집단 충돌 직전까지 간다. 친선 시합이지만 승부욕이 대단하다. 경기는 중단되고 선수들이 감독석으로 몰려들었다. 대부분 헝겊으로 발을 싸맨 맨발의 청춘들이다. 백사장 조개껍질은 뒤집혀 있지만, 가끔 날카로운 돌도 보인다. 공격수 팀 주장이 필자에게 수비수 반칙 여부를 묻는다. ‘알쏭달쏭, 긴가민가’한 태도로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잘못 대답했다가는 객지에서 비명횡사할 수도 있다. 2012년 축구시합 중 흥분한 관중들의 난투극으로 74명이 사망한 스타디움이 바로 옆에 있었다. 특별한 여가 생활이 없는 청년들의 스트레스가 과잉 행동으로 나온 듯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진정한 스포츠맨답게 선수들은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운동장으로 다시 들어갔다.



나세르 군사쿠데타와 제2차 중동전쟁

시청 건너편 광장의 ‘나세르(Nasser)’ 기념관에는 이집트 근대화 과정, 아스완댐 공사, 중동전쟁 사진 자료들이 많았다. 1952년 7월 ‘자유장교단’의 지도자 나세르 대령은 무혈혁명으로 왕정 제도를 폐지한 후, 1956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그는 이집트 공업화와 군 현대화를 위해 미국과 서유럽 자금 지원을 받고자 했다. 그러나 소련과의 양다리 외교가 불만이었던 서방 측은 원조를 거부했다. 이에 1956년 7월 26일,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전격 선언했고 통행료 수입을 아스완댐 건설 자금으로 충당한다고 발표했다. 운하운영권 공동소유국인 영국·프랑스는 결국 군사적 개입을 결심하였다.

또한, 나세르는 이스라엘 선박의 운하 통항을 금지하고 시나이반도 티란 해협까지 봉쇄했다. 이 해협의 에일랏 항구는 인도양 국가로부터 원유·원자재를 수입해 왔던 이스라엘 숨구멍이다. 1948년 독립전쟁 이후 줄곧 아랍제국 위협에 시달려왔던 이스라엘 역시 영국·프랑스와 함께 전쟁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수에즈-포트사이드 운하 구간.    필자 제공
수에즈-포트사이드 운하 구간. 필자 제공

확고한 장병 전투 의지가 전승 요인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 202공정여단이 시나이반도를 침공하면서 2차 중동전쟁은 시작되었다. 같은 날 오후 5시, 이 여단 소속 1개 대대 395명이 16대의 C-47 수송기에 분승하여 시나이반도 깊숙이 침투했다. 강습 목표는 수에즈운하 동쪽 약 40㎞ 지점의 요충지 ‘미틀라(Mitla)’ 고개였다. 뒤이어 지프 8대, 106㎜ 무반동총 4문, 120㎜ 박격포 2문과 탄약이 목표 부근의 공정대대에 공중투하되었다. 동시에 기만작전을 위해 요르단 국경에 있었던 여단 주력은 무려 350㎞(230㎞는 이집트령)를 40시간 동안 쉬지 않고 기동하여 적지의 공정대대와 합류했다. 여단의 차량·장갑차 3분의 2가 이동 중 고장으로 버려졌지만,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부대의 참된 힘은 전차·대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장병 전투 의지에 있었다. 전쟁 소식에 입원 병사들이 병원을 탈출해 부대로 돌아왔고, 소집 영장을 받지 않은 예비역들까지 여단에 합류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격전과 필사적인 이스라엘군을 마주친 이집트군은 운하를 건너 도주했다. 불과 사흘 만에 시나이반도는 이스라엘군이 석권하고 말았다.



전쟁의 중심이 된 포트사이드

1956년 10월 31일, 영국·프랑스군 폭격기들이 카이로와 이집트군 비행장을 폭격했다. 유엔 긴급총회가 정전을 권고하자 이집트는 즉시 수용했지만,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은 거부했다. 11월 5일 아침, 영국·프랑스 공정부대 1100명이 포트사이드와 건너편 포트파우드(Port Faud)에 낙하했다. 고립된 두 도시의 시민들이 군·경을 도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분노한 의지만으로는 훈련된 정예부대를 당해 낼 수 없었다. 11월 6일 영국·프랑스군은 헬리콥터로 포트사이드 시내를 급습하면서 영국군 1만3000명이 상륙했다. 11월 7일 자정, 이스라엘은 유엔 정전요구를 수락했고 영국·프랑스도 미국·소련 압력으로 결국 전쟁을 끝냈다.

포트사이드 군사박물관에는 2차 중동전쟁 당시 시민들의 영웅적인 항전 전시물들이 많다. 영국·프랑스군에게 시민군이 소총과 농기구로 대항하는 전쟁화가 인상적이다. 인근 초등학교 담벼락에도 낙하산병과 시민군 전투 상황이 대형 벽화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뼈아픈 패전을 기억하게 하는 3차 중동전쟁(6일 전쟁) 자료는 단 한 점도 없다. 어느 나라든 수치스러운 패전 역사는 감추고 싶은 모양이다.



시각장애인과 이집트인의 따듯한 마음

마땅히 갈 곳이 없어서인지 아이들이 박물관 뜰에서 놀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한국인에 대한 호기심은 가히 폭발적이다. 순식간에 몰려온 아이들의 질문 공세에 정신이 없다. 초등 6학년생 무하마드는 학교 태권도 대표선수다. 자신의 꿈은 한국에서 주최하는 세계대회에 출전하는 것이란다.

가난하지만 대부분의 이집트인은 순박하다. 시내에서 목격한 인상적인 장면이다. 한 시각장애인이 무단횡단을 하려고 지팡이를 몇 번이고 도로에 내밀었다가 뒤로 물러선다. 지켜보는 사람도 아찔하다. 어느 자동차에서 운전자가 내려 통행 차량을 정지시킨다. 이때 오토바이 1대가 멈추더니 장애인과 몇 마디 주고받는다. 곧이어 그는 아예 장애인을 자신의 오토바이에 태워 목적지까지 데려다준다. 이들의 선행을 보면서 삶의 가치를 결코 물질적 수준으로만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신종태 전 조선대 군사학과 교수>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0 댓글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