잇단 무력공격에 철모·방탄조끼 입고 선잠 다반사

입력 2021. 02. 24   16:21
업데이트 2021. 02. 24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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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평화 재건의 이름으로
-이종봉 예비역 중령
 
지역주민들 공병 장병 돕기 자청
반면 적대세력과 교전도 잇따라
‘낮과 밤’ 아이러니한 상황 연속
 
도로 건설 등 상록수 부대 활약
열악·위험한 여건 이겨낸 것은
평화 심는다는 사명 있기 때문
 
1994년 소말리아 유엔임무단 한국군 캠프 앞에서 현장을 방문한 선영제(뒷줄 왼쪽 둘째) 당시 합참 작전차장과 관계자, 외교부 직원 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파견 참모·연락장교인 이종봉(앞줄 왼쪽 첫째), 김광우(앞줄 오른쪽 첫째) 소령은 사막 전투복을 입고 있다.
1994년 소말리아 유엔임무단 한국군 캠프 앞에서 현장을 방문한 선영제(뒷줄 왼쪽 둘째) 당시 합참 작전차장과 관계자, 외교부 직원 등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파견 참모·연락장교인 이종봉(앞줄 왼쪽 첫째), 김광우(앞줄 오른쪽 첫째) 소령은 사막 전투복을 입고 있다.
당시 유엔임무단 참모장교였던 이종봉(왼쪽 다섯째) 소령이 현장을 방문한 합참, 외교부 관계자들과 현지 상황에 대해 토의하고 있다.
당시 유엔임무단 참모장교였던 이종봉(왼쪽 다섯째) 소령이 현장을 방문한 합참, 외교부 관계자들과 현지 상황에 대해 토의하고 있다.

이종봉 소령(당시 계급·예비역 육군중령)은 소말리아 유엔임무단(UNOSOMⅡ) 공병참모부 소속으로 상록수부대와 미국 공병대대, 독일·이탈리아·인도·파키스탄 공병중대에 대한 참모 활동이 주임무였다. 이들 부대·장병에게 공병 임무를 할당하고 그 수행 과정을 확인하며 평가·보고를 거쳐 임무를 재할당했다. 소말리아를 재건하는 유엔의 노력이 유의미한 성과로 이어지도록 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이 소령은 건설 작전이 펼쳐지는 각국 공병부대 임무 현장을 자주 찾아 장병들을 독려하는 일도 빼놓지 않았다. 그중 상록수부대는 가장 모범적인 부대였는데, 빠르고 정확한 것은 물론 성실함과 세심함으로 사소한 작업 하나 허투루 하지 않았다. 유엔임무단 사령부 각국 참모들이 상록수부대의 활약에 놀라워하며 건설기술 전수를 요청했던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소말리아 국민도 상록수부대를 비롯한 각국 공병부대 장병들에게 감사했다. 자신들을 위한 수고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공사가 이뤄지는 현장에서는 적대세력 등으로부터의 위협 상황이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역 주민들은 공병 장병 돕기를 자청하기도 했다.

“우리 상록수부대는 작전도로 건설을 중심으로 관개수로, 심정, 학교, 경찰서 등 주민들에게 꼭 필요하고 또 실질적으로 도움 되는 시설을 만들었지요. 주민들도 이를 알고 적대세력으로부터 상록수부대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경계·보호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오히려 위협 상황은 이동 과정에 있었다. 공병 작전 현장에 가기 위해서는 모가디슈의 사령부에서 차량을 이용해야 했는데, 도중에 난감하거나 위험한 상황을 종종 마주했다. 유엔 깃발이 날리는 차량이 지나가면 사람들이 몰려와 막아서는 것이었다. 군중 속에는 적대세력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주민들이었다. 그러고는 차량에서 물건들을 약탈해갔다. 총기부터 장비와 장치, 작은 유엔 깃발까지 돈이 될 만한 것들은 모조리 앗아갔다.

“난데없이 차량으로 달려들어 멈춰 세우면 그때를 노려 수많은 사람이 차량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렇게 약탈한 물건들은 모가디슈 시장에서 거래됐다. 그곳에서는 각국 장병들이 분실했거나 절도 당한 개인 소지품부터 총기와 실탄까지 쉽게 볼 수 있었다.

“길을 가로막으면 멈출 수밖에 없었고, 민간인을 향해 총을 발사하는 일은 더더욱 안 될 일이었습니다. 각국 장병들이 소말리아에 간 목적은 평화유지 활동이었으니까요. 자칫 곳곳에 숨은 적대세력과 교전이 벌어질 수도 있는 상황이라 극도로 긴장되고 예민한 상황이었지요. 그래서 짧은 거리가 아닐 경우 주로 헬기를 이용했습니다.”

밖이 위험하다고 안이 안전한 것도 아니었다. 사령부 영내라고 해도 위협은 끊이지 않았다. 소말리아 적대세력이 사령부를 향해 무력 공격을 해왔기 때문이다. 낮에는 유엔임무단의 업무를 돕는 소말리아인들과 함께 일하면서, 밤에는 유엔임무단을 적대시하는 또 다른 소말리아인들의 공격을 막아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사령부 안을 향해 박격포를 쏘아대는데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니 불안한 상황이 계속됐지요. 방탄조끼와 철모를 착용하고 선잠을 자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간혹 일과 후 미군 캠프를 방문해 실내에서 탁구 시합을 벌이거나, 모래밭에서 각국 장병들이 모여 배구 게임을 하는 일이 사소한 즐거움이었다. 아울러 영상 40도 가까운 한낮에 실외 활동은 엄두를 내지 못했고, 야간에도 안전을 이유로 실내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물론 일과 이후라고 해도 위협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여유를 부릴 수 없었다. 적대세력과 교전이 이어지는 현장이었다. 복지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TV와 인터넷은 물론이거니와 휴대전화도 세상에 없었던 1993년이었다.

“기본적으로 휴식할 수 있는 복지시설이 전혀 없는 상황이었지요. 서울의 가족과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통화할 수 있었습니다. 편지를 쓰면 한 달 뒤에나 답장이 왔고요. 가족·지인과 연락을 주고받지 못하는 긴 날들이 가장 큰 아쉬움이었습니다.”

열악하고 위험한 상황을 견디고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이 땅에 평화를 심는다는 사명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한국을 대표한다는 자부심은 책임감이 돼 스스로 더욱 힘을 내도록 만들었다. 서현우 기자

사진 제공=이종봉 예비역 중령


서현우 기자 < lgiant6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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