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민 한 주를 열며] 침전(沈澱)의 시간

입력 2020. 12. 24   16:05
업데이트 2020. 12. 24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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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석 민  연합뉴스 기자
오 석 민 연합뉴스 기자


얼마 전 신입 기자를 선발하는 시험에 감독관으로 다녀왔습니다. 올해 저희 회사의 필기시험 응시율은 사상 최고치였다고 합니다. 코로나19로 고용시장이 더욱 어려워졌다는데 그 방증은 아닐까 싶어 추운 날씨에 마음마저 움츠러드는 것 같았습니다. 10여 년 만에 보게 된 시험문제인데, 여전히 어찌나 어렵던지요. 긴장한 표정의 응시자들을 보니 자연스럽게 제 수험생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꼭 벼랑 끝에 서 있는 것 같았습니다. 다니던 회사를 호기롭게 그만두고 대학원 공부까지 마쳤지만, 그러는 동안 저는 신입사원으로는 부담스러운 나이가 돼버렸습니다.

그런데 감독관의 입장에서 보니 나이가 당락을 가르는 절대적인 요소는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시간을 어떻게 채웠는지 잘 설명할 수만 있다면 말입니다. 꼭 인턴이나 연수 같은 활동이 아니라 고뇌와 사색과 같은 추상적인 것, 어떤 실패의 경험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이미 이룬 자의 여유라기보다는 그 사이 여러 일을 겪으며 자연스레 느꼈습니다. 사람을 안으로 단단하게 영글어가게 하는 건 어쩌면 조금 아프고 쓴 시간은 아닐까 하는 것을요.

종종 편두통에 시달립니다. 가끔 심각할 땐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고 꼼짝없이 누워만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아팠던 어느 날, 침대 앞 화장대에 눈길이 닿았습니다. 그리고 ‘원효대사의 해골물’처럼 어떤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몸이 아프다면 저 안의 반지·귀걸이가 다 무슨 소용인가 하고 말입니다. 평범한 진리가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하면 나이가 드는 것이라고 하던데, 조금씩 철이 들어간다고 정리해도 될까요.

입사 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동기가 먼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여섯 해가 지났습니다. 가까운 사람을 멀리 보낸 게 처음이었던 저는 그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습니다. 엉뚱한 구석이 많던 친구의 모습을 생각하며 웃다가 울기를 반복했고, 머리로라도 이해하고 싶어 키에르케고르의 책부터 테드 강연까지 죽음을 주제로 한 것이라면 뭐든지 읽고 들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며 요동치던 감정은 많이 정리됐지만 기억은 그리움과 함께 단단히 가슴 한쪽에 내려앉은 것 같습니다. 이맘때가 친구의 생일입니다. 그가 정말 자주 하던 말이 “내일 걱정은 내일모레 해!”였는데,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날을 준비하는 이때에 어쩌면 딱 맞는 마음가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려고 침대에 누웠을 때 ‘오늘도 재밌었다’고 느낄 수 있을 만큼, 후회 없는 하루하루를 쌓아가려고 합니다.

지난 6개월간 칼럼을 썼습니다. 매일 글을 쓰지만 가벼우면서도 의미가 있는 이야기를 풀어내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졸렬한 글 솜씨에 자괴감이 들었던 때도 많았습니다. 기사를 쓸 때처럼 책상에 앉았을 때보다는, 잠들기 전 혹은 길을 걷다가 문득 머리에 스치는 생각이 글이 될 때가 더 많았습니다. ‘직업으로서의 기자’로 사는 저는 앞으로도 딱딱한 글을 쓰는 날이 훨씬 더 많겠지만 칼럼을 쓰는 과정, 그러니까 사람의 마음, 사람이 사는 풍경을 먼저 생각했던 경험을 앞으로도 수시로 되뇌려고 합니다.

2020년, 이토록 건강이 화두였던 때는 이전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침전의 시간, 이 또한 지나간다는 평범한 진리를 생각하며 그 고비 너머에 눈을 두려고 합니다. 불편하기는 해도 아픈 일은 누구에게도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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