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우 한주를 열며] 시간 이야기

입력 2020. 12. 18   17:04
업데이트 2020. 12. 20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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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 우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한 인 우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한 해가 저물어 간다. 날이 추워지고 낮은 짧아지고 살아있는 것들은 움직임이 둔해지고 고요한 휴식의 시간을 보낸다. 이 겨울에 자연의 시간은 천천히 흐르는 것이 분명하지만 현대 문명사회에서 인간의 시간은 더 빠르게 가는 것 같다. 올 한 해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못다 한 것들을 남은 기간 마무리하기에 분주해진다. 새삼 무심한 세월이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탄식을 하기도 한다.

시간처럼 잘 아는 것 같으면서도 알 수 없는 것이 있을까? 시간에 대해 깊이 연구한 어떤 철학자는 ‘평소에는 시간이 무엇인가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 질문을 떠올리자 알고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생리적으로 의식적으로 잘 인식한다. 항상 시간이 촉박한 현대세계에 사는 인간은 사회적 시간의 리듬에 순응해 살아가야만 한다.

시간은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신비한 존재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현대과학에서 가장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물리량이 길이도 질량도 아닌 시간이다. 그 결과 길이의 정의가 시간 측정에 기반해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이동하는 거리를 1m로 정의한다’고 바뀌게 됐다. 시간에 의해 공간이 규정된다고 할 수도 있다.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자동차 내비게이션도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 위성에서 보낸 신호가 도달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측정해 자동차와 몇 개 위성까지의 거리를 추정하고 이로부터 자동차의 위치를 결정하는 원리다.

물리적으로 시간을 측정하는 원리는 규칙적(주기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의 개수를 세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간 측정은 근본적으로 디지털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여기에 정밀한 시간 측정의 비밀이 있는 것이다. 정밀한 시간 측정은 좀 더 규칙적인 자연현상을 발견하고 그 주기성이 일정하게 유지되도록 물리적 조건을 안정화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규칙적으로 일어나는 천문현상의 예로는 지구의 자전에 의한 밤과 낮의 변화, 달의 위상 변화, 지구의 공전에 의한 계절의 변화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천문현상에 근거해 우리는 달력을 만든다. 일 년, 한 달, 하루 이런 천문현상보다 더 세밀한 시간 단위를 재기 위해 인류는 여러 종류의 시계를 만들었다. 모래시계나 물시계 등이 대표적인 예이고, 기술이 발전해 17세기가 되면 진자시계가 고안됐다. 천문현상의 경우 우리가 그 주기성을 통제할 수는 없다. 진자시계의 경우는 주기성이 진자의 길이에 의해 결정되므로 진자 길이가 변하지 않게 온도나 습도 등을 일정하게 유지해주어야 한다.

현재 국제적으로 공인된 시간의 정의는 세슘 원자에서 나오는 마이크로파의 주기를 이용한다. 그 전에는 지구자전 운동으로 시간을 정의했다. 원자시계와 지구 자전 속도를 비교해 보니 지구 자전 속도가 조석력의 작용으로 일정하지 않고 점점 느려진다는 것을 알게 됐던 것이다. 정밀한 시간의 측정과 정의는 각기 다른 시계를 비교해 보고 그 차이를 이론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으로 이뤄진다. 현재 시간 측정의 정밀도는 가시광선 영역을 이용해 수십억 년에 1초 정도 오차가 나는 시계를 개발하는 단계로 발전하고 있다.

물리적으로 가장 정밀하게 측정되는 것이 시간이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인식되는 시간은 신비하기 그지없다. 시간은 우리 의식 속에서 광속도로 빠르게 혹은 한없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느껴진다. 시간은 모든 것을 창조하지만 모든 것을 파괴하기도 한다. 시간은 만인에게 완전히 공평하게 주어진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을 전혀 제어할 수 없지만 동시에 시간을 뜻대로 활용할 수 있는 자유도 있다. 시간은 영원히 ‘낯익은 이방인’임에 틀림없다. 새해에는 ‘왕관을 벗은 편안한 이방인’을 기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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