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선애 병영칼럼] 당신의 첫 문장

입력 2020. 12. 18   17:04
업데이트 2020. 12. 20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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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선 애 
방송작가
전 선 애 방송작가



국경의 긴 터널을 지나니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졌다.(가와바타 야스나리 『설국』)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김훈 『칼의 노래』)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김애란 『칼자국』)



단 한 줄로 마음을 흔드는 이 문장들은 모두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인용돼온 소설의 첫 문장이다. 이 짧은 한 문장을 위해 작가들은 많은 날을 고뇌하고 숱한 퇴고의 시간을 거쳤다고 한다. 비교도 안 되지만, 대부분의 방송작가도 어떤 이미지와 글로 영상을 시작할 것인가는 가장 큰 숙제다. 단어 하나가 떠오르지 않아 밤새 모니터 화면에 깜빡이는 커서만 바라보는 일이 허다하다.

어디 글을 쓸 때뿐일까? 모든 시작은 힘겹고 고통스럽다. 그리고, 그 시작은 대체로 어설프고 성에 차지 않는다. 미약한 시작이 창대한 끝이 되는 일은 성경 속에서나 가능한 일인지라 “내 선택이 옳았을까” 의심하며 자주 멈칫거리곤 한다. 그럼에도 선택의 순간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온다. 나에게 이 지면이 그랬다. 방송이 아닌 지면에 글을 써보겠다며 대책 없이 결정한 후, 몇 날 며칠을 자책하며 첫 글을 썼다. 그렇게, 낯선 길을 걷듯 조심스럽게 6개월을 보내고 오늘이 마지막 지면이다. 돌아보니, 아쉬운 것투성이다. 그래도 그 무모한 시작이 있어 소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으니, 부족한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할 뿐이다.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 알았더라면 선택은 달라졌을까? 아니면 조금 더 쉬웠을까? 하지만, 지나고 나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방송작가가 된 건 우연으로 시작해 숱한 우여곡절을 겪고 나서였다. 막연히 출판사에서 일하면 어떨까 생각하던 시절, 드라마제작팀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고, 말도 안 되는 열악한 상황을 견디며 연출부 막내에서 조연출을 거쳐 라디오 작가로, 다시 TV작가로 바뀌는 모든 순간마다 선택은 늘 어려웠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미래를 치밀하게 준비할 만큼 계획적이지 못했고, 현실을 벗어날 만큼 용감하지도 못했다. 다만 주어진 선택의 기회를 피하지 않고 일단 첫발을 떼고 나면 어떻게든 길이 열렸고, 최선을 다해 걸었던 것 같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지기도 하고 다른 길로 돌아가야 했던 일도 많았지만, 한쪽 문이 닫히면 또 다른 쪽 문이 열리곤 했다. 그 시간들이 지나고 난 다음에야 알게 된 건, 지나간 시간은 돌이킬 수 없고 미래는 아무리 계획해도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후회란 무엇인가를 선택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았을 때 온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선택해야 내가 어떤 사람인지 비로소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은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지(冬至)다. 밤은 내일의 빛을 품어 키우는 시간. 어둠 속에 갇힌 듯 내일이 두려운 누군가, 이 밤을 까맣게 지새우고 있을지 모르겠다. 첫 문장을 쓰는 작가처럼 엉켜버린 생각들을 풀어내느라 힘들지만, 문득 떠오른 한 단어를 용기 내어 세상 밖으로 꺼내놓기를 바란다. 첫 단어가 있어야 다음 문장이 열린다. 어렵게 쓴 첫 문장이 썩 맘에 들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기를. 글은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어야 완성된다는 것만 잊지 않으면 된다. 그 떨리는 모든 시작에 뜨거운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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