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상처 위로한 것은 정치가 아닌 축구였다

입력 2020. 12. 02   16:44
업데이트 2020. 12. 02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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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미한 전쟁, 희비가 엇갈린 두 국가
- 레오폴트 갈티에리와 마거릿 대처 
 
포틀랜드 섬 영유권 둘러싼 전쟁
아르헨티나 선제공격으로 촉발
영국의 승리로 지배권 공고해져 
 
양국 갈등, 멕시코 월드컵서 2차전
마라도나 활약으로 아르헨티나 勝
국민에 위안 주며 영웅으로 부상 
  

포클랜드전을 다룬 트리스탄 바우어 감독의 영화 ‘포탄의 섬광’(2005)의 한 장면. 포클랜드전에 투입된 아르헨티나 18세 청년 에스테반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필자 제공
포클랜드전을 다룬 트리스탄 바우어 감독의 영화 ‘포탄의 섬광’(2005)의 한 장면. 포클랜드전에 투입된 아르헨티나 18세 청년 에스테반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필자 제공

남대서양에 있는 포클랜드 섬은 18세기 영국인들에게 처음 발견됐다. 하지만 남극권의 척박한 토양과 기후를 지닌 이 섬에 영국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았고 소유권은 자연스럽게 남미를 지배하던 스페인으로 넘어갔다. 1816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가 자국 영토임을 선언했으나 남극권의 무인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기는 어려웠다. 아르헨티나는 포클랜드를 독일 상인들에게 맡겨서 관리했는데 포클랜드에 정착한 독일인들은 그곳을 근거지로 해적 행위를 벌였다. 그들의 해적 행위로 남극 항로를 오가는 유럽과 남미 선박들이 피해를 보자 영국 해군은 포클랜드를 점령해 그곳에 기지를 건설했다.

아르헨티나는 독립 후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어갔고 20세기에 접어들어 명실상부한 10대 경제 대국에 올랐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아르헨티나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정치적 혼란까지 더해졌다. 아르헨티나의 혼란은 1976년 집권한 비델라 대통령 시기 절정에 이르렀다. 경제지표가 바닥을 찍었고, 빈부 격차와 부정부패가 극심했다. 비델라의 뒤를 이어 집권한 레오폴트 갈티에리(1926~2003) 장군은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저항하는 국민을 가혹하게 탄압했다. 저항과 탄압의 강도가 점차 높아지자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은 돌파구를 모색하기로 했다. 군부 정권은 영국이 점령한 포클랜드 섬의 영유권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국민의 반영(反英) 감정을 자극했다. 외부의 적을 만들어서 내부의 갈등을 봉합하려는 고전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다. 지지율 상승에 고무된 아르헨티나 군부 정권은 1982년 4월 2일,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포클랜드 섬을 공격했다. 100여 명에 불과한 영국군 수비대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군부 정권은 말비나스(포클랜드)를 되찾았다는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당시 영국의 상황 역시 좋지 않았다. 1960년대 이후 영국은 지나친 고임금과 복지정책으로 노동생산성이 악화한 상황이었고, 파업 역시 증가했다. 대규모 식민지를 상실했기에 안정적인 수출시장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대 세계 9위였던 영국의 1인당 GDP는 1976년 18위까지 떨어졌다. 영국 정부가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하자 혼란은 가중됐다. 이 시기에 집권한 마거릿 대처(1925~2013) 총리는 급진적인 개혁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실업률이 증가해 거센 반발에 직면했고 내각 지지율은 최저로 떨어졌다. 이런 영국의 상황을 간파한 갈티에리는 영국이 1만2000㎞ 이상 떨어진 포클랜드까지 진출하는 군사작전을 펼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경제적 위기 탓에 당시 영국은 ‘역사상 가장 허약한 해군’을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영국은 갈티에리의 예상을 깨고 신속하게 기동함대를 편성해 포클랜드 탈환에 나섰다. 영국 왕실의 앤드루 왕자도 해군 헬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오랜 시간 국가적 침체기를 겪었던 영국인들은 정부의 결연한 의지에 열광했다.

전쟁은 대서양의 어센션섬에서 발진한 영국의 장거리 폭격기가 포클랜드 섬의 활주로를 파괴하면서 시작됐다. 탁월한 선제공격이었다. 섬의 활주로를 상실한 아르헨티나 공군기들은 본토에서 출격해야 했고, 전투 지역에 단 5분 정도만 머물 수 있었다. 수직이착륙기 ‘해리어’의 활약으로 영국군은 곧 제공권을 장악했다. 아르헨티나 해군 순양함 ‘벨그라노’가 영국 잠수함 ‘컨커러’의 어뢰 공격으로 격침되자 전세는 영국군 쪽으로 급격히 기울었다. 아르헨티나 공군이 프랑스제 ‘엑조세’ 미사일로 영국 구축함 셰필드를 격침하는 등 분전했지만 이미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을 수 없었다. 영국군은 5월 21일 포클랜드의 산카를로스항에 상륙했고, 6일 뒤 구스그린 요새를 탈환했다. 보급이 끊긴 아르헨티나군은 6월 12일 항복했고, 포클랜드 전쟁은 영국의 승리로 종결됐다.

포클랜드 전쟁 이후 양국의 명암은 엇갈렸다. 아르헨티나는 군부 정권이 이듬해 붕괴하고 민주주의 정권으로 바뀌었지만, 경제는 계속 악화했고 군사력도 회복하지 못했다. 반면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 대처 내각은 정권 연장에 성공했으며 개혁정책을 유지할 동력을 얻게 됐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의 승리로 영국은 ‘대영제국’의 건재함을 세계에 알렸고, 영국인들은 자신감을 되찾았다.

지난 2010년 6월 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에서 열린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감독인 마라도나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10년 6월 7일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에서 열린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 감독인 마라도나가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포클랜드 전쟁으로 형성된 영국과 아르헨티나의 앙금은 4년 후 멕시코 월드컵까지 이어졌다. 아르헨티나와 잉글랜드가 8강에서 격돌하자 언론들은 ‘제2의 포클랜드전’으로 대서특필했다. 양국 국민은 ‘축구전쟁’에 몰입했지만, 결과는 ‘축구 신동’ 디에고 마라도나(1960~2020)가 활약한 아르헨티나의 2대1 승리였다. 마라도나는 두 골을 모두 넣었다. 특히 결승 골은 지금도 역대 월드컵 베스트 골로 회자되고 있다. 이 경기와 월드컵 우승은 당시 아르헨티나 국민에게 큰 위안이 됐고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의 ‘국민영웅’으로 부상했다. 어리석은 지도자가 벌인 전쟁으로 죄 없이 죽은 사람들을 위로한 것은 정치가 아닌 축구였다. 지난달 25일, 마라도나가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지금 아르헨티나에는 마라도나의 얼굴과 등 번호 숫자 ‘10’을 문신으로 새기면서 애도하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이 뜨거운 애도의 저변에는 1982년 남대서양의 차가운 섬에서 벌어졌던 전쟁의 기억이 놓여 있다.  <이정현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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