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석민 한주를열며] 그 겨울의 랩소디

입력 2020. 11. 01   13:36
업데이트 2020. 11. 01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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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도 겪었는데!’라는 마음가짐
힘들 때마다 용기 낼 수 있는 밑거름 

오석민 연합뉴스 기자
오석민 연합뉴스 기자

인생에서 가장 혹독한 겨울이었다. ‘마와리’라고 불리는 수습기자 생활. 사건을 찾아 종일 경찰서와 병원 장례식장을 돌아야 했다. 잠은 하루 세 시간 남짓, 휴일은 없었다. ‘다나까’의 말투에, 얼굴의 웃음기도 금지였다.

손등이 터서 피가 난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순간 혹한의 전방에서 군 생활을 했던 동생의 모습이 떠올라 눈물이 핑 돌았다. 요령 없이 화재 현장을 돌았던 날엔, 밤새 변기를 붙잡고 있어야 했다. 눈에 잘 띄지 않게 서울역의 노숙자를 취재하려고 머리에 스카프를 쓰고 돌아다니다가 험한 꼴을 당할 뻔했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부검 참관을 다녀온 날의 기억은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기자가 될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바칠 듯한 각오를 잊은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매 순간 체력적·정신적인 한계에 부딪히며 끌려다니려니, 목구멍까지 악에 받쳤다. 비극일수록 뉴스의 가치가 큰 것만 같은 ‘이 바닥의 법칙’도 어떻게 소화해야 할지 몰랐다. 집에 두고 온, 온기가 있는 모든 것들은 하루아침에 성냥팔이 소녀의 환상 같은 게 됐다.

카르페디엠(Carpe diem)과 같이 고통스러운 현재도 즐길 수 있는 배포가 그때 내게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까? 이 악물고 버텼던 시간은, 한참의 시간과 함께 그 거친 기억이 다듬어지고 나서야 마주할 용기가 생겼다.

과거의 도제식 수습기자 교육에 대해서는 사실 여러 찬반 의견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경찰서에서 여러 달을 먹고 자는 식의 교육 방식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논란을 모두 차치한다면, 암흑 같았던 그 10년 전의 100일이 나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의미가 있다고 굳게 믿는다. 지금도 급할 땐 아무 데나 주저앉아 노트북을 켠다. 습자지 같은 밑천이 다 드러나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건 묻고 또 묻는다. ‘그런 일도 겪었는데!’ 하는 마음은 은근한 용기가 되기도 한다.

여러 ‘군필’ 기자들은 마와리가 군대와 비슷하다고 한다. 절대로 두 번 겪지는 못할 거라고. 그러면서도 모두가 한두 개쯤의 무용담과 평생 잊지 못할 에피소드를 갖고 있다.

지금도 많은 장병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쌓으며 낯선 경험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여러 정책적인 요소로 ‘요즘 군대’는 다르다지만, 그저 그 상황이 주는 고충과 아픔이 있다. 물리적으로 혹독한 상황을 겪어봐야 바로 배울 수 있다는 어떤 어른들의 말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누구나 ‘나의 경험’이 가장 강렬하고 애틋하다.

살아가며 쓰고 매운 날들은 계속 찾아올 것이다. 불행이나 어려움이 내 것이 아니기를 바라기보다는, 세상에 버릴 경험은 없다는 단단한 마음을 한 번씩 들여다보려고 한다. 위안이 되는 것들을 곁에 두고 말이다.

그 겨울 내게 가장 위로가 됐던 것은, 같이 고생한 동기들 그리고 편의점의 군것질거리였다. 가족들 목소리를 들으면 무너질 것 같아 “바쁘니 전화하지 마시라”고 했지만, 장례식장 취재를 마치고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던 어느 날엔 주차장 구석에 쭈그린 채 수화기 너머 엄마 품에 한참을 안겨 있기도 했다.

다시 겨울이 온다. 추위에 손등이 트는 신입 기자도, 전방의 이등병도 이제는 없겠지 하면서도 정말로 없었으면 좋겠다고 나지막이 중얼거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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