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진 독립군단체 연합 위해 가장 힘쓴 지도자

입력 2020. 10. 22   16:50
업데이트 2020. 10. 22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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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청산리전투 승전 100주년 특집 독립군의 영웅 홍범도 장군 <7·끝> 


봉오동전투 이후 삼단연합 균열…홍범도의 북로정일제1군 독자적 활동
서로·북로군정서와 새로운 삼단연합 추진…일본군 간도 침공으로 무산
청산리전투 승전 후 서로군정서·광복단과 ‘대한의용군’ 조직 사령관 취임

중국 길림성 화룡시에 세워져 있는 청산리대첩비.  독립기념관 김도형 선생 제공
중국 길림성 화룡시에 세워져 있는 청산리대첩비. 독립기념관 김도형 선생 제공

청산리대첩비의 비문.  독립기념관 김도형 선생 제공
청산리대첩비의 비문. 독립기념관 김도형 선생 제공


봉오동전투 이후 삼단연합의 균열

봉오동전투 승전 직후부터 삼단연합 단체들 간에 균열의 조짐이 나타났다. 일제 측 첩보보고서에 따르면, 최진동은 봉오동전투 당시 홍범도가 “응전(應戰)을 충실하게 하지 않고 급속 퇴각시킨 것이 독립군 의기를 떨어뜨린 주원인”이라며 홍범도를 통렬하게 꾸짖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홍범도는 항의하지 않고, 부하들을 이끌고 다니며 각 지방에서 시위운동을 하여 독립의 기세를 회복하겠다는 각오를 밝혔고 최진동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홍범도는 자기부대를 이끌고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 중국명 먀오거우)로 주둔지를 옮겼다. 사실상 최진동을 부장으로 하는 북로독군부와 별도의 독립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국민회와 도독부 간의 관계 역시 악화되었다. 일제첩보자료에 의하면 북로독군부장 최진동의 압박과 탄압을 견디지 못하여 독군부 내의 국민회 측 인사인 강상모, 강승범, 조권식이 지휘하는 3개 중대가 명월구로 가서 홍범도 진영에 합류했다는 것이다.

마침내 국민회가 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있던 중(1920년 8월 9~12일) 8월 10일 오후 5시경 대한북로독군부에 소속되었던 국민회 계열의 제3, 제4 중대가 독립을 선언하고 탈퇴하였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에 따라 국민회는 독자적인 군사기관으로 대한국민군사령부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사령장관 안무)



국민회와의 관계

전반적으로 1920년대 내내 홍범도는 북간도로 들어온 이후부터 국민회의 인적·물적 지원을 받아 북로정일제1군 사령관으로서 사실상 국민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 북로독군부 부장 최진동의 압박과 국민회 공격이 심해지면서 국민회 계열의 병력이 홍범도진영으로 옮겨올 정도였다. 홍범도는 1920년 6월 이후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의 지도와 국민회의 협조로 추진된 명월구 무관학교 설립 계획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국민회가 대한국민군사령부라는 독립적인 군대를 창립한 8월 중순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홍범도의 북로정일제1군과 안무가 지휘하는 대한국민군은 별도의 지휘체계하에 각자 독립적으로 활동하였다. 결국 봉오동전투 승리를 가져왔던 삼단연합이 무너진 상태에서 일본군 대병력의 ‘포위·토벌전’을 맞게 된 것이다.



새로운 삼단연합의 추진

중국군의 독립군 ‘토벌’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1920년 8월 하순 이후 북간도지역 독립군의 삼림지대로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연길현 명월구에 자리 잡고 있던 홍범도의 정일제1군이 먼저 길림성 안도현(安圖縣) 방면의 백두산록으로 이동을 시작하였다. 안무의 대한국민군, 의군부, 신민단, 의민단 등도 뒤따랐다. 대한군정서(북로군정서)는 사관연성소 생도들의 졸업식 때문에 곧바로 이동하지 못하고 9월 9일에 졸업식을 마친 후에 이동하였다.

훈춘사건(1차)으로 일본군의 침공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홍범도는 9월 20일경 앞서 협력관계를 맺고 있던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의 두 군정서와 새로운 삼단연합에 합의하였다. 즉, 홍범도와 서로군정서 측은 북로군정서에 대표자를 보내어 안도현(安圖縣)에 집결하여 세 독립군단체를 세 개의 사령부로 나누어 두되 하나의 총괄기관을 설치하여 통솔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일본군의 간도 침공으로 인하여 이 새로운 삼단연합은 실현되지 못하였다. 세 단체 간의 삼단연합은 청산리전투 후 연해주 이만으로 넘어가기 전 북만주 호림(虎林) 도목구(到木溝)에서 비로소 실현된다.

홍범도 군대는 9월 상순까지 연길현 의란구(依蘭溝) 서북단에 주둔하고 있었다. 중국군의 공격이 임박하자 홍범도는 휘하 병력 약 300명을 이끌고 안도현의 잉두산(仍頭山)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의란구를 떠났다. 당시 홍범도는 부하들에게 “이제부터 1, 2개월 이내에 반드시 일본군대의 출동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일본군대와 교전하는 것을 꺼리지는 않지만 이 지방에서 전사하는 것은 개죽음과 같다. 그렇다면 일시 백두산 지방으로 회피하여 결빙의 계절을 기다려 일보라도 국내로 매진하여 의미 있는 희생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며 일본군의 침공에 대비하였다.

일본군의 침공이 예상보다 빨리 이루어지는 바람에 홍범도부대는 안도현 대신에 화룡현(和龍縣) 이도구(二道溝)·삼도구(三道溝) 일대로 이동하였다. 홍범도는 흩어져 있는 부대를 무산(茂山) 간도와 광포(廣浦) 방면에 집결시키고 정일제1사령관으로서 ‘선지 침습의 최선봉’임을 다짐하였다고 한다. 당시 홍범도는 “일본 군대의 출동에 의하여 독립군은 이제야 일·중(日中) 양국 군대와 경찰 때문에 압박을 받고 심하게 행동이 제지되고 있다. 고로 이때 일거에 국내를 침습하든가 또는 간도 내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든가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다”라며 일본군과의 결전의지를 다졌다.


청산리 전투 당시 홍범도 부대가 소지했던 수류탄과 탄약.  필자 제공
청산리 전투 당시 홍범도 부대가 소지했던 수류탄과 탄약. 필자 제공

일본군의 공격

일본 정부는 한반도 주둔 제19사단을 주력으로 제20사단의 지원부대, 시베리아 침략군(11, 13사단, 북만주파견대, 14사단 28여단), 관동군으로 ‘독립군토벌대’를 편성하고 독립군을 동서남북에서 포위·섬멸코자 했다. 일본 침공군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서 들어와 북간도 각지의 주요한 거점들을 점령했다.

일본군은 백두산 산울 지역인 화룡현의 이도구·삼도구 일대로 이동한 독립군의 주력, 즉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 군대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군대를 섬멸하기만 하면 독립군 전체를 제어할 수 있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일본군은 이 두 군대를 집중적으로 포위하고 퇴로를 차단하며 공격하였다. 약 1주일에 걸쳐 백운평, 완루구, 천수평, 어랑촌, 천보산, 고동하 등지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을 상대로 얻어낸 승리는 ‘독립군 섬멸’이라는 일본군의 침공목표를 좌절시킨 데 있다. 일제당국은 홍범도 부대가 청산리전투 당시 “이도구, 어랑촌, 봉밀구에서 일본군에 완강히 저항한 주력부대”였다고 평가했다.

승리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홍범도 군대는 여러 전투를 끝낸 후 우두양창에서 일본군과 홍후즈의 공격으로 “우둥(불) 앞에 볼쪼이던 군사는 씨도 없이 다 죽고 그 나머지는 일패 도주하니 다시 갱무여망이 되었다”고 회상하였다. 청산리전투 직전에 520명이었던 홍범도의 병력은 우두양창에서의 대패로 전사하고 흩어지는 바람에 40여 명으로 줄어들었다. 이들은 안도현 쪽으로 가다가 제1중대장 리천호를 만나 합이 200명으로 안도현 삼인방(三人方)으로 들어갔다. 이곳에서 홍범도의 북로정일제1군은 이청천이 이끄는 서로군정서 교성대, 조동식의 광복단과 연합하여 ‘대한의용군’을 조직하였고, 홍범도는 사령관에 취임했다. 김좌진과 홍범도는 청산리전투 2개월 후인 1920년 12월 중순경 발표한 공동명의의 ‘해산한 아군사(我軍士)에게 고(告)한다’에서 일본군의 막강한 병력 앞에서 ‘일시의 변법’으로 무장해제를 하고 일본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고 청산리전투를 평가했다.

1920년대 항일무장투쟁이 남긴 역사적 교훈

봉오동과 청산리로 대표되는 1920년의 항일무장투쟁은 우리의 독자적인 힘에 의하여 승리했다는 데 커다란 의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군단체들이 연합을 달성하지 못하고 분산적으로 활동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얻지 못했다. 대병력을 앞세운 일본군과 중국군의 개입과 탄압이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독립운동 진영 내부의 문제도 없지 않았다. 1920년을 ‘독립전쟁의 원년’으로 선포한 임시정부는 이용, 안정근, 왕삼덕 등 특사를 파견하여 연합을 추진했지만, 지도부의 분열과 대립으로 항일무장투쟁에 대한 리더십 발휘와 충분한 물적 지원을 하지 못했다. 이 모든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운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한말의병 이래 독립군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연합을 몸소 실천했던 빈농 출신의 독립군대장 홍범도가 아닐까 한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홍범도 장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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