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모 2인과 ‘유고문’ 반포…항일무장투쟁 노선 천명

입력 2020. 10. 21   17:12
업데이트 2020. 10. 2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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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청산리전투 승전 100주년 특집 
독립군의 영웅 홍범도 장군 <6> 
 
3·1운동 이후 독립군정부로부터 총사령관 선임 ‘대한독립군’ 명칭 태동
1919년 10월 북간도 진출 흩어진 의병 규합…12월 독립전쟁 시작 선언
이듬해 5월 3대 무장단체 연합 성립…한 달 뒤 봉오동전투 승전 디딤돌 

 
추풍 당어재골에서


홍범도는 밀산에서 지낸 2년 반의 생활을 “산저장녹(山猪獐鹿. 멧돼지와 노루, 사슴)을 잡아먹기 시작하여 햇수로 이태 반을 사영(사냥)하였다”고 압축적으로 회상했다. 홍범도는 1915년 가을 밀산으로 들어가며 가져갔던 총을 밤중에 추풍 당어재골(다아재골)의 최의관(최병준) 집으로 운반하여 땅에 묻어 놓았다.

일본헌병대의 체포를 피해 가까스로 살아남은 15만 원 사건의 주역 최봉설(최계립)은 1919년 9월 당어재골에 머물고 있던 홍범도를 찾아간 경험을 기록으로 남겼다. 최봉설과 철혈광복단 단원들은 북간도 3·13 만세시위 당시 동포 17명의 피살을 목도한 바 있고, 대한국민의회 군무부장 김하석의 주선으로 동중철도 수비대(백위파 호르바트 군대)에 입대했다가 고역(苦役)뿐인 군대생활로부터 탈출한 청년들이었다. 


홍범도는 당시 “아무 일도 없이 시세에 맞추어 한번 일어서야 하겠는데 어쩔 셈인지 근심 중”에 있었다. 최봉설 일행은 “선생님 별것 없이 혼자라도 북(北)하마탕에 가십세다. 우리 간도 청년들이 모두 담당할 터이니 근심 마십시오. 군인들이며 총이며 피복이며 모도 근심 말고 선생이 오기만 하면 조선독립은 다 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오십시오.” 


주인 최병준은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서 일행을 접대하였다. 일행은 홍범도에게 용정의 일본은행을 털 것을 약속하였다. 최병준의 권유로 최봉설 일행은 2주일 동안 일을 하여 여비를 마련하고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15만 원 사건에 사용할 단포(단총)와 폭탄(수류탄)을 마련하고 간도로 나갔다.


애국지사 최병준

망명 이후 둘째 아들 용환을 맡아 키운 홍범도의 의병 동지 최병준에 관한 가슴 아픈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1919년 가을 최봉설 일행이 당어재골을 다녀간 직후의 일이다. 


아들 최찬식과 홍용환은 밤중에 한인 마을 신길동에 수상한 조선사람 2명이 은신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일본정탐이라고 판단하고 이들을 처단하였다. 나중에 이범윤의 ‘관리사(의군부)’ 대원들이 피살된 두 사람이 자기네 소속 독립군이라며 찬식과 용환을 체포하였다. 


이에 최병준은 이들에게 “내가 당신네 대원 두 사람을 일탐(日探)이라고 알고 처단하였다”라고 말한 후에 자총(自銃)하였다. 최병준이 자결하자 찬식과 용환은 곧바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그 후 관리사 군대 대원들은 신길동 최찬식 집에 달려들어 최병준의 며느리를 구타하고 찬식과 용환을 내놓으라고 강박하였고, 나중에는 피살된 두 사람의 시체를 내어 놓으라고 만행을 하는 바람에 찬식과 용환은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일화와 더불어 최병준은 홍범도가 가장 신뢰했던 진실한 애국자로서 오랫동안 기억되었다.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3·1운동이 발발한 후 이동휘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군정부(軍政府 또는 獨立軍府)’가 조직되어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요 집행간부로는 독립군총사령관 홍범도, 지휘관 이용, 접제원 최병준, 황원호, 군자금 모집 오주혁, 박군부, 주계(主計) 김립, 이중집 등이 선임되었다. 독립군정부는 홍범도에게 ‘독립군총사령관’으로서 북간도로 가서 독립군을 지휘하라는 통지서를 보냈다. 홍범도부대의 고유명칭처럼 되어 후일 일반화된 ‘대한독립군’ 명칭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동휘와 홍범도는 오래전부터 독립운동노선에 관하여 의견을 교환하여 왔다. 정태(본명 정용규)에 따르면, 체코군의 봉기(1918년 6월 말) 이후 득세한 백위파와 일본군을 피해 중국 보첩에 은신하고 있던 이동휘가 1918년 9월 밀산에 머물고 있던 홍범도를 찾아와 오랫동안 담화를 나누고 갔다고 한다.

홍범도가 항일무장투쟁을 위해 북간도로 발진한 것은 1919년 10월 1일(음력 8월 8일)이었다. 홍범도는 “18년 전 고려 독립만세가 불일 듯함으로 농사고 뭐고 나가자 하고 묻어 두었던 총을 내여 일변 닦으며 일변 의병모집과 탄환모집과 일변 원조하여 의병을 입힐 것과 천리경 그러한 것을 갖추나니 1919년 8월 8일 밤에 떠나 106인이 무장을 메고 앵덕에 당진하니…”라고 회상했다.

그리하여 홍범도군대는 이후 수청(현재의 빨치산스크 일대)에서 백위파와 싸우다가 도피해 와서는 동행을 간청한 러시아 빨치산 세 명과 함께 중국 훈춘(琿春)의 차모정자(草帽頂子)로 들어갔다. 홍범도군대는 차모정자 서쪽 골짜기의 한인촌에서 주둔하던 중 습격한 홍후즈(중국 마적) 70명을 처치하고 90명을 잡고 총(50개), 탄약(1200개), 아편(여섯 봉지), 천(190자), 대양화(300원)와 일화(700원)를 전취했다. 다음 날 홍범도 부대는 밤에 나자구 하마탕의 ‘예수촌’에 들어가 무장을 벗고 주둔하였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북간도에 들어온 이후 허근(허재욱·허영장) 등 과거의 의병들을 규합하였다. 신채호 등이 북경에서 발간하고 있던 『천고(天鼓)』는 “독립선언이 이미 선포되고 노(老)의병대장 홍범도, 허근 제씨는 옛 부하들을 모집하였다. 노령으로부터 나와 북간도에 주둔하여 ‘의용단’이라고 칭하였다”라고 기록하여 놓았다. 일제의 첩보보고서에 의하면, 둘째 아들 용환이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제4대 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유고문.   필자 제공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유고문. 필자 제공

1919년 12월 ‘대한독립군의용대장’으로서 홍범도는 참모 박경철, 이병채와 함께 3인의 명의로 ‘유고문(諭告文)’을 반포하였다. 박경철은 국민회에서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을 위하여 참모장으로 지정하여 준 인물이고, 이병채는 허근의 오랜 의병 동지였다. ‘유고문’을 통하여 홍범도는 항일무장투쟁노선을 천명하였다. 정의·인도를 주창하는 평화적 만세운동 방식이나 파리강화회의나 국제연맹에서의 외교적 활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무장투쟁에 의해서만이 독립 달성이 가능하다며, 군국대사를 주모하는 상해임시정부의 광명정대한 선전포고를 기다려 독립전쟁을 시작하겠다고 선언했다.


‘북로정일제일군사령부’ 사령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두만강변의 국경지대로 진출한 것은 1920년 4월 말이었다. 이를 홍범도는 일지에서 “19년 10월 14일부터 20년 3월 초3일에 무단봉에 나가 사흘 유숙하고 있다가 행군하여 봉오꼴 최진동진과 연합하여”라고 회상했다.

3·1운동 이후 우후죽순처럼 등장한 무장단체들의 통합은 절실한 과제였다. 이는 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를 중심으로 1920년을 ‘독립전쟁의 해’로 선포한 임시정부의 방침과도 부합하는 것이었다. 우선 북간도의 대한국민회는 홍범도에게 대한독립군과 국민회 계열의 군대로 구성된 ‘북로정일제일군사령부(北路征日第一軍司令部)’의 총지휘권을 맡겼다. 이와 동시에 국민회는 북로군정서 못지않은 무장력을 갖춘 최진동의 대한군무도독부와의 통합에 나섰다. 국민회와 북로군정서(대한군정서)는 서로 다른 종교적·지역적 배경의 차이와 격심한 경쟁으로 통합이 어려웠다.

마침내 1920년 5월 19일 홍범도의 북로정일제일군, 군무도독부, 국민회 군무위원회 간 연합이 이루어져 대한북로독군부(부장 최진동, 부관 안무)가 성립되었다. 국민회, 정일제일군사령부, 군무도독부의 ‘삼단연합(三團聯合)’이 성립된 것이다. 홍범도는 정일제일군사령관으로서 대한북로독군부의 ‘외번(外藩)’ 격으로 그 지휘명령권이 독군부 부장이나 국민회 회장에게 속하지 않는 독자적인 위상을 유지했다. 1920년 6월 일본군을 상대로 한 봉오동전투에서의 승전은 바로 삼단연합을 주축으로 국민회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신민단 군대가 합세하여 이루어낸 쾌거였다.

봉오동전투의 두 주역 홍범도(왼쪽)와 최진동.  필자 제공
봉오동전투의 두 주역 홍범도(왼쪽)와 최진동. 필자 제공

봉오동전투를 지휘했던 사령관으로서 홍범도는 스스로 동포들의 성원에 보답해야 한다는 점을 절감하고 있었다. 그는 “고향산천을 떠나 타국의 영토를 떠돌아다니며 비참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동포들로부터 금전과 곡식의 의연을 받고 있는 것이 심대한데, 만일 우리가 독립의 뜻을 버리거나 세계 각국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 있다면, 우리 동포들에게 무슨 면목이 있겠는가”라고 말하여 농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얻고 있었다.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홍범도 장군』저자
반병률 한국외대 사학과 교수/ 『홍범도 장군』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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