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저널 스페셜] 창원의 3·1만세운동

입력 2020. 10. 20   16:43
업데이트 2020. 10. 20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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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주민 연합 격렬 시위 이어가… 들불처럼 번진 항일투쟁


항구도시 특성상 일찍이 침탈 대상됐던 마산
구마산 장날 시위 이후 감시·탄압 더욱 가혹해져
외곽 농어촌 확산… ‘마산 삼진 의거’ 기폭제 역할
진동·진전·진북면 연합, 세 번에 걸쳐 대규모 시위
1960년 3·15의거 등 사회운동 정신적 토대되기도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마산 문창교회 앞에 세워져 있는 3·1운동 참여교회 기념동판.
창원시 마산합포구에 위치한 마산 문창교회 앞에 세워져 있는 3·1운동 참여교회 기념동판.

창원은 개항 이래 일제의 경제적·정치적 침략으로 많은 이권을 빼앗겨, 저항의식이 강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곳의 독립 만세운동은 더 많은 농민이 규합해 대중적이며 완강한 항일 투지를 발휘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을 향한 열망을 항일 투쟁으로 불태운 창원의 만세운동을 조명해 본다. 글·사진=박영민 기자

창원은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까워 일찍이 침략의 거점이 됐다. 일제는 마산에 1909년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 출장소를 설치하고, 농민들의 토지 박탈과 고율의 소작료 징수 및 고리대를 통한 수탈을 자행했다. 


1910년 10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이루어진 토지조사사업의 결과 마산지역의 농민들은 토지 박탈과 경작권 상실 및 고율의 소작료에 시달렸다. 특히 마산은 항구도시라는 지역 특성상 일제의 본격적인 식민화 정책이 일찍이 행해진 곳으로 상권 침탈이 극심했다. 


더욱이 일제는 진해의 군항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1910년 12월 31일 마산 개항장을 폐쇄한 이후 마산항을 대일 쌀 수출과 소비성 물품의 수출·입항으로 삼아 경제적 침탈을 본격화했다. 일제는 진해를 군항으로 만들기 위해 토지를 수용하고 1910년부터 10년간을 제1기로 해서 군항 건설에 착공했다. 


애국지사 사당 전시관 내부 모습.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한편, 삼진의거에 관한 이야기를 후세들에게 전하는 전시물이 전시돼 있다.
애국지사 사당 전시관 내부 모습.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뜻을 기리는 한편, 삼진의거에 관한 이야기를 후세들에게 전하는 전시물이 전시돼 있다.

삼진의거를 주도했던 팔의사를 추모하기 위해 ‘팔의사 창의탑’과 함께 조성된 추모비.
삼진의거를 주도했던 팔의사를 추모하기 위해 ‘팔의사 창의탑’과 함께 조성된 추모비.


1914년 진해만 요새사령부가 마산에서 진해로 이전하고, 1916년에 진해요항부가 개청하는 등 일제 수탈의 대상이 됐다. 이러한 시대상으로 인해 창원지역은 일제에 대한 저항의식이 짙게 깔렸었고, 1919년 3~4월 약 2개월 동안 13회에 걸쳐 3·1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은 4월 3일 진동·진전·진북면 3개 지역 주민들이 연합해 대규모로 일어난 ‘4·3 삼진 연합 대 의거’를 들 수 있다.


애국지사 사당 전시관.
애국지사 사당 전시관.


항일 투쟁의 도시 창원에 울려 퍼진 그 날의 함성

마산의 3·1 운동은 3월 3일 김용환이 독립선언서를 군중에게 배포하는 사건으로 시작됐다. 김용환은 3월 3일 고종의 국장(國葬) 참관을 위해 마산 무학산에 모인 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주고 조선의 독립과 항일 투쟁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김용환은 현장에서 검거돼 마산 경찰서에 연행됐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항일운동의 분위기가 조성돼 창신학교, 의신 여학교 학생을 비롯해 인근 각 지역에서 만세시위를 위한 준비가 본격적으로 진행됐다. 


기독교계 인사와 학생들의 시위 준비와는 별도로 지역 인사들에 의한 시위 계획도 활발히 추진됐다. 2월 25일 비밀결사단체인 대동청년단으로부터 서울로 올라오라는 지시를 받고 서울의 3·1 만세시위에 참여했던 변상태와 김관재는 3월 3일 마산으로 귀향해 지역 인사들에게 서울의 만세시위 소식을 알리고 독립선언서와 ‘조선독립신문’을 전달했다. 


3월 10일 이들은 추산정에서 시위를 모의하고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러나 출동한 일제 헌병에 의해 현장에서 참가자 전원이 검거·연행됨으로써 시위 계획이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각기 개별적으로 시위를 준비하던 종교계·학생·지역인사들은 추산정 사건 이후 보다 효과적인 만세운동을 전개할 방안을 모색했다. 이에 운동세력 간의 연계와 규합을 통한 대규모 시위를 전개키로 합의했으며, 3월 21일 제1차 구마산 장날 시위가 대대적으로 전개됐다. 3000여 명에 이르는 시위대는 김익렬이 보부상으로 가장해 가져온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에 장터의 군중들도 합세해 만세를 부르며 시내로 진출했다. 이날의 시위는 시종일관 평화적 만세시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강압적·폭력적 진압으로 일관했다. 


제1차 구마산 장날 시위 뒤 3월 26일 장날을 기해 제2차 구마산 장날 시위가 있었다. 이날의 시위는 구속 인사 석방이라는 구체적 요구가 전면에 등장하며 1차 시위보다 그 정도가 좀 더 격렬해졌다. 


두 차례의 구마산 장날 만세시위 이후 시위 재발 방지를 위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가혹해졌다. 하지만 시민과 학생들의 항일 투쟁 분위기는 오히려 고조됐다. 제2차 구마산 장날 시위에 이어 5일 후인 3월 31일 장날 제3차 구마산 장날 시위가 다시 일어났다. 


처음 3월 31일의 장날을 기해 폭발한 만세시위는 이제 장날만 되면 일어날 정도로 지속적인 양상으로 나타났으며 그 과정에서 시위 참가자의 요구 또한 구체화했다. 구마산 장날의 세 차례 시위는 일제의 무차별 탄압 검거에 대한 분노가 더해지며 시위가 진행될수록 격렬하게 고조됐다.


창원과 함께 진해에서 일어난 4·3독립만세운동 표지석.
창원과 함께 진해에서 일어난 4·3독립만세운동 표지석.


가장 격렬했던 만세운동 4·3 삼진 의거

마산 시내 장날을 기해 시작된 대규모 만세시위는 3월 말로 접어들며 외곽 농어촌지역으로까지 퍼지며 더욱 격렬해져 갔다. 마산지역 3·1독립만세운동의 가장 대표적 만세시위인 마산 삼진 의거가 폭발한 것이다. 마산 삼진 의거는 3·1독립만세운동의 절정기에 폭발한 전형적인 민중적 민족운동으로 1919년 3월 28일 1차와 1919년 4월 3일 2차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마산시 진전·진북·진동 3개 면이 연합한 대규모 시위였다. 3월 28일 마산 진동면 고현 시장에서 발발한 제1차 삼진 의거와 4월 3일 발발한 제2차 삼진 의거는 모두 같은 지역 주민에 의한 같은 투쟁 대상과 목표를 갖는 시위로 시위의 계획단계부터 전개까지 같은 주동자와 가담자에 의한 연속성을 갖는 만세운동이었다.


4.3 삼진의거 발상지인 성구사.
4.3 삼진의거 발상지인 성구사.
 

마산 삼진 지역의 만세시위는 마산 시내의 구마산 장날 시위와는 별도로 서울의 3·1독립만세운동이 발발한 직후부터 이미 계획되고 있었다. 조선 국권 회복단과 대동청년단 단원으로 활동하던 변상태는 자신의 연고지인 삼진에서의 만세시위를 위한 계획에 착수했다. 시위 준비에는 변상태를 비롯해 권영조 권영대 변상헌 변상섭 권태용 백승학 백운태 등 삼진 지역 주민들이 참여했다. 이들은 진동면 고현 시장 장날인 3월 28일 장터에서 시위하기로 하고 준비 작업에 착수했다. 백승학이 중심이돼 진전면의 성구사(誠久詞) 등지에서 비밀리에 태극기를 제작했다. 성구사는 4·3 삼진 의거가 일어나기 전 독립선언문과 태극기를 만들고, 마을에 독립운동을 전하기 위해 거사를 모의한 곳으로 4·3 삼진 의거 발상지로 전해지는 곳이다. 


3월 28일 금요일 오후 1시경 마산 진동면 고현 장터에 많은 사람이 모여들자 백승학이 가운데 마련된 단상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뒤이어 권영대가 독립 만세 선창으로 군중 속에 있던 주동자들이 일시에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외쳤다. 아울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며 시위를 본격적으로 주도해 나갔다. 이에 장터에 모여 있던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시장을 몇 바퀴 돈 뒤 거리로 나와 진동으로 향했다. 일본 헌병은 고현 시장에서 시위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 즉시 마산 주재 육군 중포병 대대로 연락해 병력을 지원받아 시위 진압에 나섰다. 


일제는 비무장 평화 시위대를 총검을 앞세운 잔혹한 방법으로 진압했다. 그 결과 시위대는 수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체포·연행되는 가운데 오후 5시경 해산됐다. 1919년 4월 3일 발발한 제2차 마산 삼진 의거는 단일 시위로는 마산지역 3·1 만세운동 중 가장 격렬한 연합 대 시위로 흔히 ‘4·3 삼진 의거’로 불리는 만세시위다. 3월 28일의 제1차 삼진 의거에서 검거를 피했던 변상태 권태용 권영대 변상헌 등은 곧바로 재차 시위를 모의했다. 이들은 시위 일자를 4월 3일로 정하고 비밀리에 참가자 규합에 착수했다. 4월 1일에는 시위를 위한 사전 모의가 여러 장소에서 있었다. 


성구사에서는 변상태 권영대 등이 시위의 세부 사항을 최종적으로 논의했다. 이날 모임의 참석자들은 대부분 제2차 삼진 의거에서 중심 역할을 한 인물들로 시위 도중 순국하거나 체포·구금됐다. 시위 당일인 4월 3일 진전면 양촌리 냇가 둑에 세워진 장대에 매단 대형 태극기 아래로 인근 주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오전 9시경 2000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변상섭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변상태가 대한 독립 만세를 선창하자 만세 함성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운집한 군중은 태극기를 흔들고 만세를 부르며 진동 쪽으로 나아 갔다. 행렬이 마을 어귀에 다다르면서 부근의 주민들도 시위대에 속속 합류했다. 처음 출발할 때부터 대규모인 데다 도중에 합류한 사람들로 인해 시위대의 전진 속도가 그다지 빠르지는 않았다. 


시위 행렬이 진동면 소재지에서 2㎞ 정도 떨어진 진북면 지산교 부근에 다다를 무렵 시위 군중은 더욱 불어났다. 이곳에서 대열을 재정비한 시위대는 사동교 쪽으로 나아갔다. 시위 소식을 접한 진동 헌병 주재소는 마산 육군 중포 병 대대에 병력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무장 헌병과 헌병 보조원 및 일본 재향군인 30여 명을 즉시 사동교 건너편에 배치했다. 이 지점에서 시위 군중과 일본 군경 간에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일 군경의 무차별 사격으로 많은 희생자를 내며 시위대는 오후 3시경 해산될 수밖에 없었다.

제2차 삼진 의거는 격렬했던 만큼 엄청난 희생을 남겼다. 시위에 앞장섰던 8명이 숨지고 부상자만도 22명에 달했다. 그러나 일제도 헌병과 헌병 보조원 등 3명이 다쳤다. 이날 희생을 면한 시위 참가자 중 다수는 검거돼 재판을 받고 복역했다. 마산은 1백여 명에 이르는 애국지사·시민·학생들이 체포 구금되거나 실형을 선고받는 와중에도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일제에 대한 저항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비인간적 만행이 자행될수록 투쟁에 대한 열기는 더욱 뜨거워져 갔다. 


마산 시내에서 시작된 만세시위는 3월 말로 접어들며 마산시 외곽 농어촌으로까지 퍼지며 더욱 격렬해져 갔다. 더욱이 4월에 이르러서는 마산 공립보통학교 (현 마산 성호초등학교)의 어린 학생들까지 22일부터 연 3일간 교내에서 독립 만세를 부를 정도로 나이·지역·계층을 망라한 민족운동으로 퍼져 갔다. 이처럼 민족의식과 정치의식이 높아진 민중들은 이후 다양한 사회운동과 조직을 성장시켰는데, 특히 1960년 3월 15일 자유·민주·정의를 외쳤던 3·15의거의 정신적 토대가 되기도 했다.


박영민 기자 < p1721@dema.mil.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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