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종필 기고] 국산 1호 항공기 부활호, 두 개의 타이틀을 거머쥐다!

입력 2020. 08. 03   15:36
업데이트 2020. 08. 03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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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종 필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군무주무관
원 종 필 공군사관학교 공군박물관·군무주무관

공군사관학교에는 보물이 많다. 씩씩하게 교정을 행진하는 생도들이 가장 큰 보물이고, 날개처럼 학교를 감싼 든든한 산의 능선들, 그 속에 담긴 하늘과 바람과 비행기 소리도 공사의 보물이다.

다른 종류의 보물도 있다. 공사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 자리하고 있는 역대 공군의 항공기들이다. 그중에는 대한민국 최초의 항공기, 최초의 전투기 등 몇몇의 ‘최초’가 있다. 내가 학예사로서 박물관에서 하는 일 중 하나는 바로 이 ‘최초’를 찾아주는 일이다. 아니, 사실은 그 ‘의미’를 찾아주는 일이다.

지난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산하의 국립중앙과학관으로부터 공문 한 장이 도착했다. 과학 분야의 자료 중 국가적으로 중요한 자료를 보존·활용하기 위해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 제도가 생겼는데, 이에 대한 협조를 부탁하는 내용이었다. 그렇다면 공군에서 지정될 것은 자명했다. 최초의 국산 항공기 부활호!

1950년대 초반 독립운동가이자 공군 창설의 주역인 제2대 공군참모총장 최용덕 장군은 공군의 비행기 개발을 공군 발전의 한 축으로 강조했다. 그리고 1953년 당시 공군기술학교 교관인 이원복 소령과 정비사들은 장비와 물자의 부족 등 갖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국산 항공기를 완성한다. 1954년 4월 이 항공기는 세상에 공개되며 ‘부활(復活)’이라는 이름이 붙여진다. 전쟁으로 피폐해진 국민의 마음을 위로하고 찬란한 미래를 기원하는 뜻을 담은 것이다.

부활호가 만들어진 1953년 우리나라는 자동차도 만들지 못하던 나라였다. 이때 공군에서 비행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래서 그간 문화재 분야에서 국가적으로 중요한 근현대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인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해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또 다른 ‘의미’를 찾아 줄 기회가 온 것이다.

신청서 작성은 일사천리였지만 현장조사가 고비였다. 당시 심사위원들 사이에서 부활호의 복원이 논란이 됐다. 사실 부활호는 1960년대까지 연습기로 사용되다가 자취를 감췄다. 그 후 2003년 한 신문사에서 이원복 선생을 인터뷰하는 과정에서 그 존재가 널리 알려졌고, 우연히 그 기사를 읽은 대구의 한 고등학교 퇴직자의 제보로 학교 지하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부활호를 찾을 수 있었다. 그 부활호를 공군에서 수리·복원해 다시 살려낸 것이다.

나는 부활호가 ‘부활’한 경위는 오히려 놀라운 것이지, 부활호 자체의 진정성을 손상시키지 않는다고 설득했다. 그리고 당시 제작에 참여했던 이원복 선생과 오늘날의 공군이 힘을 합쳐 복원했다는 의미를 강조했다. 다행히 결과가 좋아 지난 7월 29일 과기정통부 장관 명의의 등록증을 교부받았다.

이로써 ‘국가등록문화재’ 부활호는 ‘국가중요과학기술자료’로 등록돼 두 개의 국가적 타이틀을 가진 유산이 됐다. 그러나 열 개의 타이틀보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부활호가 국민 모두에게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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