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기 넘치고 윤기 흐르는 얼굴, 어깨 휜히 드러낸 채 뚫어져라 바라보는 눈빛… 유혹하는, 광야의 성자

입력 2020. 01. 22   17:30
업데이트 2020. 01. 22   1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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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세례 요한’


‘세례 요한’ 하면 떠오르는 덥수룩한 수염, 초췌함, 고뇌, 기도는 없다.
다빈치의 세례 요한은 다르다. 자유롭고 독창적인 그 그림의 원천은… 

 
천재성? 그것만일까? 자신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감의 원천을 공부에서 찾게 된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세례 요한’.  필자 제공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세례 요한’. 필자 제공
한스 멤링이 그린 ‘세례 요한’.  필자 제공
한스 멤링이 그린 ‘세례 요한’. 필자 제공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가 그린 ‘세례 요한’.  필자 제공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가 그린 ‘세례 요한’. 필자 제공
헤르트헨이 그린 ‘세례 요한’.  필자 제공
헤르트헨이 그린 ‘세례 요한’. 필자 제공

오늘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세례 요한’이다. 세례 요한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로 유대인들을 일깨우고 요단강에서 물로 세례를 주었던 성자다. 예수님도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렇다면 당시 다른 화가들은 어떻게 세례 요한을 그리고 있었을까?

한스 멤링(Hans Memling)이 그린 ‘세례 요한’을 비롯해 헤르트헨(Geertgen tot Sint Jans)이 그린 ‘세례 요한’,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Bartolome Esteban Murillo)의 ‘세례 요한’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지쳐 보인다. 당연하다. 쉼 없이 헌신하는 분이니까. 초췌하다. 당연하다. 몸을 사리는 분이 아니니까. 수염이 덥수룩하다. 그조차 가꿀 시간이 없을 테니까. 그리고 골똘하게 생각 중이거나 기도 중이다. 아마도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더 깨우치게 할까 고민하는 중이리라.

이번에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린 ‘세례 요한’을 보겠다. 지난 시간에 이어 또 어떤 반전이 있을까 기대되는데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세례 요한’은 고뇌나 기도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유혹한다. 어떤 사람이 저런 눈빛과 손짓으로 여러분을 바라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게다가 어깨는 드러나 있고, 왼손은 가슴에 얹고 있다. 유혹이 아니면 뭘까?

또 이상한 것은 중년이 아니다. 그전 세례 요한은 대부분 그렇게 그려졌다. 그러나 이 세례 요한은 청년이다. 뭐 그럴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수염도 없다. 광야에서 고행하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말끔할까? 세심하게 보면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명하지도 않다. 중성인 듯 그려졌다. 세례자 요한인데 말이다.

더 자세히 보면 지쳐 보이지 않는다. 활기가 넘친다. 초췌하지 않다. 얼굴에서 윤기가 흐른다. 고뇌하는 모습은 당연히 아니다. 그는 우리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세례 요한일까? 아주 아닌 것은 아닌데, 뭔가 조금씩 다르다.

이번 작품에서도 역시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우리에게 수수께끼를 던진다. ‘모나리자’에서,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에서 그랬듯이 말이다. 또 이 작품에서 특이한 것은 오른 손가락이다. 대부분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뭘 가리키는 것일까? 하지만 확실한 것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참고는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바쿠스’에서도 주인공이 손가락으로 어디를 가리키는 장면을 그렸다. 성 안나 마리아, 아기 예수, 어린 세례 요한이 그려진 ‘벌링턴 하우스 카툰(The Burlington House Cartoon)’에서 성 안나의 손가락도 어디를 가리키고 있다. 너무나 유명한 ‘최후의 만찬’을 보면 도마의 손가락 역시 어디를 가리키고 있다.

도대체 그곳은 어디일까? 이번이 레오나르도 다빈치 세 번째 시간인데 이제 그의 스타일이 눈에 좀 들어올 듯하다. 그런데 오늘은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자. 어떻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저토록 차원이 다른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까? 보통 살다 보면 주변의 말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생각에 제약이 생기고, 행동에도 범위를 만들게 된다. 결국 비슷해지는 거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독창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 혹시 은둔자였을까?

아니다.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라는 사람이 있다. 이탈리아 사람인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죽을 때 여덟 살이었으니 동시대 사람으로 봐야겠다. 그는 큰 업적을 남겼다. 당시 예술가들 200여 명의 삶과 작품을 책으로 냈는데 그 책이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전』이다. 당대에 쓰였던 것인 만큼 신뢰할 수 있는 책이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이렇게 기록했다.

‘몸매가 아름답기는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함이 없다. 또 행동은 우아하고, 깊이가 있었으며 훌륭하기가 비길 데가 없다. 그의 정신은 고매했으며, 성격은 너그러워서 모든 이에게 존경받았고, 그러다 보니 명성은 높아만 갔다.’

물론 단점도 지적했다. ‘성격이 좀 변덕스럽다, 일의 마무리가 부족하다’는 거다. 그거야 다방면의 호기심 때문에 벌어진 문제였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조르조 바사리는 이런 일화도 적어 놓았다. ‘그는 길을 가다 새장에 갇힌 새를 보면 풀어줬다. 값은 본인이 지불했다.’

비춰 보면 그는 외골수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자유로운 그림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 천재성? 그것만일까? 나는 자신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다시 그의 ‘세례 요한’을 보자. 자신감이 넘치는 화가의 작품을 보게 되면 눈이 시원해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은 거침이 없다. 흔들리지 않는 기운이 있다. 자신감이 아니라면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그 자신감의 원천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공부에서 찾게 된다. 그는 공부를 정말 많이 한 화가다. 역대 화가 중 1등이 아닐까 한다. 1편에서 입이 아플 정도로 코덱스를 보였다. 대부분 어른이 되면 공부를 하지 않는다. 궁금한 것이 생기면 주변 정보로 해결한다. 요즘 같은 때는 정보가 넘쳐나니 더욱 편리하다. 그런데 그것에만 의존하면 속을 수도 있다. 구름처럼 떠다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부를 통한 지식은 다르다.

오늘 본 ‘세례 요한’은 몇 살 때쯤 작품일까? 답은 노년의 작품이다. 거의 마지막 작품이다. 그런데 어떻게 청년의 느낌이 날까? 노쇠함이 없다. 공부를 계속하면 정신조차 나이 들지 않는 것일까? 좋은 작품은 감동만이 아니라 어떤 깨달음까지 준다.


<서정욱아트앤콘텐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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