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설명은 어디에도 없고… 툭툭, 수수께끼를 던진다

입력 2020. 01. 15   15:44
업데이트 2020. 01. 1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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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필자 제공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필자 제공
지롤라모 다이 리브리가 그린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지롤라모 다이 리브리가 그린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알브레히트 뒤러가 그린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

오늘 소개할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이다. 이 작품은 1499년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가 딸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에게 주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등장인물은 세 명이다. 첫 번째 주인공은 성모 마리아의 친정어머니 성 안나다. 두 번째는 예수의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 세 번째는 아기 예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 셋을 등장시켜 대중에게 어필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비교를 위해 다른 화가들이 같은 주제로 그렸던 두 점의 작품과 같이 보겠다.

첫 번째는 베네치아에서 유명했던 지롤라모 다이 리브리가 같은 주제로 그린 것이다. 현재 런던 내셔널갤러리에 있다. 두 번째는 독일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로 불리는 알브레히트 뒤러의 작품으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있다.

첫 번째부터 보면 주인공들은 위대한 일을 행하기 전 기념사진이라도 찍듯 경직된 자세를 하고 있다. 특히 도드라지는 것은 아기 예수다. 몸집만 아기지 포즈는 어른이다. 오른손의 손가락을 들어 세상 사람들을 깨우쳐 주고 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복장은 화려하다. 시골 사람들이 아니다. 이미 성인들이다. 아래의 그림이 설명을 도와준다. 세 명의 천사가 찬양하고 있다. 배경에 특별한 점은 없다. 강이 보이고 그 너머로 성들이 보인다. 단지 성 안나 성모 뒤에 열매 달린 나무가 좀 어색해 보이는데, 하늘로 분산되는 시선을 막으면서 주인공에게 집중시키려는 의도다. 화가 지롤라모 다이 리브리는 조금씩 과장해 대중에게 어필하려고 한다. 수식어를 많이 쓴 문장 같아 보인다.

두 번째 작품은 대담하게 클로즈업했다. 군더더기는 다 빼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천사나 교회당이나 머리의 후광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배경도 단색이다. 제목을 보지 않으면 그저 할머니와 어머니와 아기의 초상화로 보인다. 아기는 자고 있고, 어머니는 아기를 위해 두 손 모아 기도한다. 할머니는 오른손으로 아기를 안고 왼손은 엄마의 어깨를 어루만져준다. 푸근한 가족의 느낌이 든다. 이 작품은 모든 면에서 현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자연관찰에 남달랐던 알브레히트 뒤러다운 작품이다. 그는 성 안나와 성모와 아기 예수를 현재의 시점으로 불러들였다. 그래서 마치 옆집에 사는 이웃을 그린 듯이 보인다. 알브레히트 뒤러는 이런 사실감을 어필의 포인트로 삼았다. 이렇듯 화가들은 각기 다른 특색으로 이 주제를 그렸다.

그런데 통일된 것이 하나 있다. 모두 친절하게 설명해준다는 것이다. 작품은 관객에게 말해줘야 한다. 그래야 소통을 하고 공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은 전혀 다르다. 친절하지 않다. 설명을 하는 것이 아니라 툭툭 수수께끼를 던지는 식이다. 그래서 공감되기보다는 궁금증에, 관객이 다가서야 한다.

편하게 해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어 보인다. 잘 보이려는 생각 역시 없어 보인다. 화가는 무심하게 혼잣말을 하는 사람 같다. 성모 마리아가 성 안나의 무릎에 앉아 있다. 걸터앉은 것이 아니다. 엉덩이 부분을 완전히 빼고 있다. 그래서 허리가 구부정해졌다. 그러다 보니 아기 예수를 잡으려는 자세가 불안정하다. 마리아의 허벅지를 보면 가벼워 보이지는 않는데 할머니인 성 안나가 괜찮을지 걱정이 될 정도다.

그건 그렇고, 저렇게 앉아있는 이유는 또 뭘까? 현실에서 보기 어려운 저 포즈를 보며 관객은 편안하지 않다.

이것도 이상하다. 할머니 성 안나와 어머니 성모의 나이 차이가 없다. 보통은 주름이나 의상으로 차이를 두는데, 이 작품은 자매처럼 그렸다. 아기 예수는 양을 붙들고 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왼 다리로 목을 감고 있다. 조르는 걸까? 노는 걸까? 아니면 양 대신 자신이 희생한다는 암시일까? 분명하지 않다. 그것이 결정돼야 성모 마리아가 말리는 것인지 계속 하라는 것인지도 알 수 있다. 관객의 마음은 점점 복잡해진다. 표정을 통해 힌트를 얻어 볼까 해도 그 역시 확실하지 않다. 화면조차 스푸마토 기법이나 대기 원근법을 사용해 아스라하게 처리했다. 배경은 일단 야외다. 그런데 현실 풍경은 아니다. 우리가 아는 시골마을도 아니고 숲도 아니다. 느낌으로 봐서는 태초의 세계 같기도 하고, 화성이나 외계의 풍경 같기도 하다. 이 작품은 어느 하나 속 시원하게 설명해 주지를 않는다. 더군다나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에게 의뢰받았다면서 왜 본인이 평생 갖고 있었을까? 상황이 이렇다 보니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왜 이렇게 그렸던 걸까? 작품에 도취돼 그리다 보니 우연히 이런 결과물이 나온 것일까? 아니다. 이것을 위한 습작들이 남아 있다. 철저히 준비해서 나온 결과물이라는 뜻이다.

이쯤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대중의 시선을 끌기 위해 사용했던 원리가 짐작될까? 키워드는 ‘호기심’이다. 그는 인간의 잠재된 호기심이란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는 세상 모든 걸 연구했다. 호기심을 자극하면 시선을 모을 수 있다는 정도는 우리도 안다. 하지만 21세기에 아는 것이지 그때는 15세기다.

사회도 단순했고, 다들 단순한 생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이미 대중의 마음을 읽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호기심이라는 키워드를 빼놓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그는 엄청난 호기심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방대한 연구의 원천이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과 다른 두 화가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두 작품은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 그에 반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은 계속 수수께끼를 던진다.  <서정욱아트앤콘텐츠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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