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 병영칼럼] 빨래 감시와 전우신문

입력 2020. 01. 15   16:24
업데이트 2020. 01. 15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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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일 요리사·칼럼니스트
박찬일 요리사·칼럼니스트


이번 회에도 이어지는 ‘라떼(나때)는 말이야’ 시리즈. 1986년도 군번이니 이른바 민주화 시대 이전의 군대였다. 생활관에서 책을 보는 것과 관련된 규칙이 있었다. 물론 병사들끼리 만든 것인데, 적어도 상병 중간 시점은 지나야 토플책이든 유행하는 베스트셀러든 볼 수 있었다. 간부라든가 선임병이 “이제 너는 책을 보아도 되느니라” 뭐 이런 결정적 허락이 있는 건 아니었다. 우선 책을 슬쩍 관물대에 보이도록 두었다. 이제부터 책을 봐도 되겠습니까? 이런 언질을 주는 것이었다. 타이밍 딱 맞게도 어느 선임이 이런 말을 하게 돼 있다. “캬, 우리 김 상병, 책 보는 거야? 영어책이야 뭐야?” 이러면 은근슬쩍 공인(?)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아니면 이런 상황도 있었다.

“요새 말이야. 짬밥도 안 되었는데 책 읽고 말이야. 군대는 책 읽는 데가 아이다, 이기야.”

소대 군기를 조율(?)하는 선임병의 이 한마디는 독서의 운명을 정해 버리곤 했다. 당시는 컴퓨터도,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었으니 한가함을 신문이나 책으로 달래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그런 부류였는데, 군대에서 활자를 차단당하고 나니 상당히 불편했다. 그게 활자 중독이란 걸 알았다. 눈이 벌게지게 활자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발간일이 한참 지난 전우신문(현 국방일보)이라도 발견하면 ‘빨래 감시’를 틈타 읽곤 했다. 그때 우리나라 육군 부대 이름을 참 많이도 알게 됐다. 화랑, 노도, 전진, 태풍, 뇌종, 백두산에 각 예하 연대마다 또 흑표니 돌격이니 하는 이름이 붙어 있었으니까. 어쩌다 휴일에 짬이 나면 생활관에서 전우신문 보는 건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다.

전우신문 말고 부대에 책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건 일병 정도 되어서였다. 중대행정반에 진중문고라는 게 있지 않은가. 그 진중문고에 들어갈 책을 결정하는 위원회나 참모부가 있었을 텐데, 주로 군대에 적합하게 여겨지거나 군인의 건전한 양식에 좋다는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논어』 『맹자』 『장자』에 『손자병법』 『징비록』 『난중일기』 같은 것들이었다.

나는 시간 나는 대로 그 책을 독파해 나갔다. 특이한 책이 하나 있었는데 『롬멜의 산악전투』였다. 그게 진중문고였는지, 간부용 전사(戰史) 책이 흘러온 건지 알 수는 없었지만 흥미롭게 읽었다. 독일군 원수 롬멜은 흔히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의 여우’라고만 알려졌지만, 1차대전 때 알프스 산악지대에서 이미 혁혁한 전공을 올린 맹장이었다. 롬멜은 히틀러에게 충성했지만, 나치당원은 아니었다. 어쨌든 롬멜이란 군인과 그의 지휘력에 대해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된 건 순전히 내가 군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우연히 읽은 책으로 리더십 공부를 하게 된 것이었다.

세월이 흘러 요즘 진중문고 목록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각 분야의 양서들이, 그것도 최신 책까지 꽉 차 있는 게 아닌가. 이럴 때 나는 분해서 또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라떼는 말이야. 진중문고에서 『논어』를 읽고 말이야….”

병사 여러분, 휴대전화도 좋지만 진중문고도 좀 보세요. 재미있는 책이 얼마나 많은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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