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장소를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간을 바꾸기 위해서 여행한다.”
―장 피에르 나디르(JEAN-PIERRE NADIR), 『여행 정신(L’esprit du voyage)』 중
우리는 주어진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간다. 누구도 원하는 시대와 장소를 골라서 태어날 수 없었듯이, 살아있는 동안 육체가 머무르는 공간 속에서 나를 인식하는 것은 모두의 숙명이다. 인간의 뇌는 생존에 필수적인 정보들을 수집하고 처리하는 일에 총력을 기울이기 위해 ‘지금, 여기(here and now)’에 우선적으로 집중한다. 그래서 지금이 아닌 과거나 미래,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몰입하기란 매우 어렵다. 우리는 언제나 현재에 붙들린 존재들인 것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짐을 꾸리기 위해 목적지의 기상 정보를 확인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 숫자로 적힌 기온을 읽고 얼마나 춥거나 더울지를 짐작하는 것은 의외로 어렵다. 외부 공기의 온도에 반응하는 피부의 감각기관이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기억에만 의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금이 아닌 다른 시간을 떠올리거나 시간의 흐름을 감지하기란 인간에게 만만치 않은 과제다. 눈과 귀 등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쉼 없이 수집되고 있는 정보들을 활용해서 어떤 의미 있는 사고 활동을 할 것이냐는 오랜 시간의 훈련과 학습 과정을 통해서 달라진다. 따라서 동시대에 유사한 환경 속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속한 시간을 인식하는 방식은 각기 다르다.
어느 날 거울에 비친 나이 든 내 모습을 낯설게 바라보거나 훌쩍 커버린 아이를 대견스럽게 여기게 되거나 고층 건물이 가득 찬 서울의 한강변을 지나다가 문득 세월의 힘을 느낄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당신은 경험이 많고 성숙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하루 스물네 시간, 일 년 삼백육십오 일을 헤아려 가며 살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백 년 남짓이다. 하지만 그 시간을 어떻게 감지하고 자신의 존재를 확장하는가에 따라 우리는 각기 다른 시간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아무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나에게 얼마나 긴 시간이 예정되어 있는지도 모르면서 나의 존재를 앞서거나 뒤따를 시간의 의미를 온전히 파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시간의 감옥 속에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다행스럽게도 시간을 깨치는 인간의 능력은 특별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말처럼, 시각적 허상을 통해서 자신을 외계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여기는 경험에 스스로를 가두는 대신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지닌 아름다움을 섬세한 눈으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감옥을 부수고 나설 수 있다. 나에게 주어진 오늘 이 시간을 통해서도 우주 만물의 이치를 가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한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미약하지만,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시간은 무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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