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재적소 리더십…상황별 인재 기용이 ‘승리’ 보장

입력 2017. 12. 11   17:49
업데이트 2017. 12. 1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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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리더십도 적재적소가 있다


영국의 명장, 몽고메리

실패 가능성 무시하고

무리한 군사작전 펼쳐 대패

 

심각한 위기 빠진 크라이슬러

구원투수로 아이어코카 영입

회생 뒤엔 독선이 오히려 걸림돌

 

 


손자병법의 구변 편은 성향에 따른 장수의 다섯 가지 유형을 언급한다. 상황에 따라 가장 맞는 유형의 장수를 기용해야 승리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강한 공격이 필요할 때는 과감하고 임기응변에 능한 ‘공격형’ 장수를, 철저한 방어가 필요할 때에는 신중하고 뚝심 있는 ‘수비형’ 장수를 써야 한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수립된 전략을 누가 실행하느냐가 중요하다. 다음 사례는 상황에 맞지 않는 리더 기용으로 조직 전체가 큰 피해를 본 사례다.


수비형 장수 몽고메리

제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을 대표할 만한 명장은 몽고메리다. 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이 독일군에 연전연패한 끝에 1942년 카이로에서 200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엘 알라메인까지 밀려나자 처칠은 그를 사령관으로 기용했다. 몽고메리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고, 무기·탄약 등을 본국에서 꾸준히 조달해 전력을 비축하면서, 정교한 대책을 세워 적이 공격할 때마다 강한 수비로 적의 힘을 빼놓는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고는 적기에 독일군을 타격해 이듬해 3월 튀니지에서 항복을 얻어냈다. 이 전공으로 몽고메리는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영국군의 총지휘를 맡게 됐다. 그런데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단숨에 파리까지 점령했던 연합군의 공격 속도가 벨기에에 다다르자 현저히 늦어지기 시작했다. 연합군이 진격해 나감에 따라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일선 부대 보급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교착 상태를 뚫고자 그해 9월 몽고메리는 연합군 총사령관이었던 아이젠하워를 설득해 독일 본토로 곧바로 진격할 수 있는 소위 마켓가든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그런데 이 작전은 애초부터 무리가 많았다. 네덜란드 내의 독일로 향하는 좁은 고속도로를 먼저 공수부대가 장악하고, 이를 통해 주력군인 영국 30군단이 탱크를 앞세우고 독일 본토로 진격해 들어간다는 것이 작전의 개요였다. 이 도로에는 총 7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주력부대의 진격을 위해서 이 다리들을 적이 파괴하지 못하도록 확보하는 것이 공수부대의 주 임무가 됐다. 공수부대는 특성상 중화기를 가져갈 수 없어서 탱크의 공격에 매우 취약하므로 주위에 탱크 부대 등이 없어야 하는 것도 전제 조건이었다. 그런데 총 길이가 100㎞에 달하는 이 도로는 매우 좁아 탱크 하나만 길 위에서 파괴되거나 서버리면 모든 대열의 행진이 멈추게 돼 있었다.

몽고메리는 이 작전의 실패 가능성을 가벼이 여겼다. 심지어 독일로 넘어가는 아른헴다리 근처에 적 탱크 부대가 있다는 정찰기의 보고도 묵살했다. 우려는 현실이 됐고, 결국 이 작전은 대실패로 마감했다.

수비형 장수로서 아프리카 전선에서 전과를 올렸던 몽고메리는 본인이 직접 전선을 확인할 수 있고 전황의 전개를 예상할 수 있는 수비전에서는 치밀한 작전 계획으로 큰 성과를 거뒀으나, 공세작전을 지휘할 경우 세워둔 정교한 작전계획이 실제와 맞지 않을 때 전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순발력이 없었다.



위기의 재연 맞은 크라이슬러

경영 현장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있다. 1970년대 말 미국 자동차 업계의 빅3 중 하나인 크라이슬러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1978년 아이어코카가 구원투수로 영입됐다. 그는 1979년 의회를 설득해 파산 지경에 다다른 크라이슬러의 부채 15억 달러를 미국 정부가 보증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의회의 도움으로 시간을 번 그는 대규모 인력 및 사업 구조조정과 함께 신차 개발로 위기를 돌파해갔다. 크라이슬러가 출시한 두 소형차종이 큰 성공을 거둔 데 이어 1981년 닷지 에어리스를 필두로 ‘K-카’라고 불리는 신차종들이 대박을 치면서 크라이슬러의 재무상황은 곧바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미니밴으로 이 회사는 재무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크라이슬러가 회생에 성공해 본격적으로 성장 궤도로 들어섰을 때 아이어코카의 리더십이 이제는 걸림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턴어라운드 당시 빛을 발했던 그의 카리스마가 갈수록 아랫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독선으로 변해갔다는 것이다.

그 무렵 자동차 시장의 메인 트렌드는 에어로다이내믹 즉 공기역학이어서 포드 사나 GM은 공기역학을 반영한 신차들을 속속 내놓았다. 그런데 크라이슬러는 이런 경향과 반대로 나갔다. 아이어코카 때문이었다. 그는 신차 디자인에 개입하면서 자신의 취향에 맞춰 신차종을 모두 각진 형태로 만들도록 지시했다. 1988년 발매된 이 차종들은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 이 회사의 재무상태는 다시 곤경으로 치달았다. 급기야 1991년에는 7억9500만 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만약 크라이슬러가 1980년대 후반 아이어코카 대신 안정기에 맞는 새로운 리더를 택했더라면 80년대 말 위기의 재연은 없었을 것이다.

리더십에도 적재적소가 있다. 아무리 능력 있는 인재라도 상황에 따라 조직에 위해를 끼칠 수도 있다. 상황에 가장 맞는 유형의 인재를 기용해야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김경원 세종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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