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버전보기

국방일보

2021.07.24(토)

속보
기획  < 군사  < 금주의전투사

<26>화살머리(Arrow Head · 281)고지 전투

기사입력 2009. 07. 06   00:00 입력 2013. 01. 05   04:46 수정

페이스북 바로가기 트위터 바로가기 카카오톡 바로가기

중공군 1300여 명 사살, 소총 100여 정 노획 등 전과


전쟁을 군사적인 승패가 아닌 명예로운 휴전으로 마감하기로 한 유엔 측과 공산 측은 6·25전쟁을 진지전으로 변환시켜 참호전, 고지 쟁탈전, 수색 정찰전을 수행했다. 확보한 전선을 고수하기 위한 참호전, 좀 더 유리한 고지를 탈취하려는 고지 쟁탈전, 그리고 상대의 공격기도나 방어의지 및 상태를 파악하기 위한 수색 정찰전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특히, 철원평야를 감제하기 위해 공산 측은 백마고지(395고지)와 이의 서쪽에서 화살머리처럼 남쪽으로 돌출된 화살머리고지(281고지)를 탈취하기 위해 지속적인 공격을 감행했고, 철원평야를 감제당하지 않으려는 한국군은 이들 두 고지를 확보하기 위해 공산 측의 공격을 끝까지 막아낸 방어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양측은 결코 가볍지 않은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철원평야 북단에서 한국군 2사단(김웅수 준장)과 대치하고 있던 중공군 23군(종국초)은 1953년 6월 12일 밤, 예하 69사단 205연대를 투입해 백마고지를 공격했으나 한국군 2사단 32연대의 철저한 진지방어와 계획된 화력 세례를 극복하지 못했다.

이에 중공군은 예하 73사단 병력을 백마고지 남서쪽 3km 지점에 위치한 화살고지로 투입시켜 이를 점령하고 백마고지 측방을 위협함으로써 두 고지를 동시에 탈취하기 위해 먼저 화살머리고지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1차 : 1953. 6. 29∼30일, 2차 : 1953. 7. 6∼11일). 양측이 벌인 화살고지에 대한 공방전에서 한국군 2사단은 연대급 작전에서 사단급 작전으로 확대 실시해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 두 고지를 끝까지 확보하고 휴전을 맞이했다.
한국군 2사단은 미9군단(Reuben E. Jinkins 중장)의 작전 지시에 따라 1952년 12월 29일부로 미3사단이 방어하고 있던 전투지역을 인수한 후 31연대(조성래 대령)를 우측에,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를 포함한 지역인 좌측에 32연대(강홍모 대령)를 배치하고 17연대(김필상 대령)를 예비로 삼아 방어에 임했다.

한국군 2사단은 우측에 미2사단(Double E. Barriger 소장)과 좌측에 미7사단(Arthur G. Trudeau 소장)과 전선을 연결한 가운데 10km의 전투 정면을 방어하고 있었다. 2사단은 95% 수준의 병력과 장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군단 미12포병대대를 비롯해 15·37·674포병대대의 화력지원과 미5공군의 지상전술 공군 화력도 지원받을 수 있어 보급도 충분하고 사기도 높은 편이었다.
2사단 32연대는 1953년 6월 29일 화살머리고지 바로 전방에 전초진지 두 개를 구축하고 화살머리고지를 방어하면서 전초진지 서북방 800m 지점에 위치한 “방송고지”(공산 측의 방송반이 수시로 나타나 온갖 궤변과 욕설을 지껄여 붙여진 이름)를 공격해 봤다. 이에 맞서 중공군은 23시쯤 32연대의 전초진지를 공격해 왔다.

이에 사단은 32연대 2대대는 동굴작전으로 방어에 임하게 하고 예비인 17연대 3대대를 투입, 역습을 실시해 이를 물리치고, 다시 공격해 오는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했다. 이 과정에서 한국군은 400여 명의 중공군을 사살하고 3명의 포로와 20여 정의 소총을 노획했으나, 32명의 전사자와 3명의 실종자 그리고 44명의 부상자라는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전선은 다시 평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중공군 73사단의 공격은 1953년 7월 6일 본격적으로 실시됐다. 7월 6일 23시에 공격을 개시한 중공 73사단 218연대는 1개 소대가 지키고 있던 두 개의 전초진지를 7월 7일 03 : 50분에 점령했다. 사단은 17연대 3대대를 32연대에 배속시켜 역습을 감행해 두 소대장(김형호·박재옥 소위)의 투혼으로 좌측 진지 하나만 탈환할 수 있었다. 7월 8일에 2사단은 31연대 2대대를 투입해 우측 진지마저 탈환했다.

7월 9일 한국군은 진내사격까지 요청하면서 우측 진지를 고수하려 했으나, 중공군의 공격을 이겨내지 못하고 진지를 다시 내주고 말았다. 사단은 31연대 1대대를 투입해 진지를 다시 탈환하려 했으나 허사였다. 축차적인 공격으로 진지 탈취가 어렵게 되자, 2사단장은 31·32연대를 동시에 투입해 주간 공격 대신 야간에, 탈취하려는 전초진지와 그 후방에 위치한 중공군의 중간 거점까지 동시에 공격하는 과감한 역습작전을 계획했다.

이에 따라 사단장은 7월 11일 01시에 31·32연대로 하여금 전후방 두 진지를 동시에 공격하도록 했다. 그 결과 31연대는 전초진지를 탈환하고, 32연대는 그 북방에 위치한 중공군 중간 거점을 장악한 후 철수할 수 있었다. 이로써 한국군 2사단은 백마고지와 화살머리고지를 비롯한 원래의 전투지역을 방어하고, 이들 두 고지를 탈취하려던 중공군의 기도를 좌절시켜 버렸다.
한국군 2사단은 1300여 명의 중공군을 사살하고 100여 정의 소총과 4700여 발의 수류탄을 노획했으나, 180명의 전사와 16명의 실종자, 770여 명의 부상 피해를 입었다. 이 공방전에서 축차적인 역습보다 과감한 역습이 더욱 필요하고, 지상이나 공중화력지원이 용이한 고식적인 주간 작전보다 중공군이 흔히 실시하는 야간 작전을 수행한 것이 오히려 중공군의 허를 찔러 역습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전훈을 도출할 수 있었다.
사진설명:지난 4월 22일 프랑스 합참대 학생 장교들이 선배 전우들이 참전했던 경기 연천 화살머리고지 프랑스군 참전기념비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필자 제공

<온창일 육군사관학교 전쟁사 前 명예교수>


< 저작권자 ⓒ 국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에 대한 의견 0

의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