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조명탄

장서가의 괴로움 혹은 즐거움

입력 2026. 06. 09   16:37
업데이트 2026. 06. 09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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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처음 들어간 직장이 출판사였다. 책 만드는 일이란 게 사실은 전공 때문에 선택한 호구지책이었지만, 적성에 맞아 일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요즘과 달리 당시엔 책이 제법 많이 팔렸다. 그런데 무슨 연유인지 내가 만든 책은 상대적으로 판매 부진을 면치 못했다. 혹시나 벌써 헌책방에 나오지는 않았을까 염려하면서 청계천 헌책방들을 기웃거리곤 했다. 그때 거기서 초판본과 창간호들을 만나게 됐다. 첫 책을 내놓기 위해 노력했을 수많은 사람의 열정에 공감하면서 그런 열정이 담긴 초판본과 창간호에 어느새 애정이 갔다. 

편집자로서 느꼈던 심정 또한 첫 책을 대하는 태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무리 열심히 책을 만들어도, 정말 꼼꼼히 교정과 교열을 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책이 인쇄돼 나오면 오탈자라든가 제작상의 결함이 나타나곤 했던 경험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 느끼는 일종의 실망감이 어쩌면 가장 순수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초판본이나 창간호에는 그런 사소하거나 중대한 오류까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순수한 매체라는 의미를 스스로 부여했다고나 할까. 그런 오류도 ‘하나의 역사이자 추억’이 아닐까 싶었다. 예컨대 작가 최인훈 선생은 대표작 『광장』에 녹아 있는 역사적 오류 등을 고치려고 열 번 넘게 작품을 개정했는데, 그 과정 자체가 하나의 역사이고 그 시작은 초판이었다. 그래서 나와 다른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이 녹아 있는 초판본과 창간호를 모으기로 결심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도 책을 모아야겠다는 집념을 충동질했다. 나와 같은 60대 이상의 국민이라면 모두 동의하겠지만, 어렸을 땐 책 말고는 마땅히 즐길 만한 매체가 없었다. 학교에서도 교과서 이외에 참고서조차 마땅치 않아 교과서가 닳고 닳을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이후 이곳저곳 출판사를 옮겨 다녔다. 대학원에 진학해서는 출판사와 저작자의 관계를 연구하기 위해 ‘저작권’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렇게 석·박사과정 공부를 하던 1990년대 중반부터 대학 시간강사로 전국을 떠돌면서 초판본과 창간호를 모으는 일이 본격화됐다. 마치 보물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헌책방을 다니며 책을 모았다. 강의하는 틈틈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배낭을 둘러메고 학교 주변 헌책방을 찾아다녔다.

책을 모으는 일 못지않게 책을 보관하는 일은 더욱 힘들었다. 점차 모인 책을 보관할 공간이 부족해지고 있었다. 바로 그때 책을 모으는 일에 날개를 달아 준 고마운 존재는 현재 재직 중인 학교였다. 2001년 3월 대학 출판학 전공 전임교수로 부임하면서 수도권에선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드넓은 공간을 갖게 됐다. 그로부터 25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2024년 8월 쌀과 반도체의 고장 경기 이천시 모가면 너른 들판 가까이 아리따운 건물을 구해 ‘국내 유일의 초판본·창간호 전문서점’을 표방한 책방 문을 엶으로써 마침내 생애 후반기 소망을 이룰 수 있었다. 비로소 책을 열심히 모은 이유가 분명해진 셈이다.

아무리 뛰어난 재능도 꾸준함을 이길 수 없다고 했던가. 오랜 시간 한 권, 두 권 꾸준히 모은 책이 수만 권이 넘는 바람에 하마터면 스스로에게 재앙 아닌 재앙이 될 뻔한 순간도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책을 한곳으로 모으는 데만 트럭 10여 대가 필요했다. 이렇게 되고 보니 앞으로 이사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결국엔 여생을 즐겁게 보낼 책방이라는 고마운 존재로 거듭났으니 괴로운 시절은 이제 끝났다고나 할까. 덕분에 앞으로도 “책 든 손 귀하고 읽는 눈 빛난다”는 신념을 유지할 자신이 생겼다. 책방은 이제 나의 아지트 겸 놀이터로 변신하려고 다양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김기태 세명대학교 미디어콘텐츠창작학과 교수
김기태 세명대학교 미디어콘텐츠창작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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