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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낡은 편견 깨고… 할매, 날다

입력 2026. 06. 09   15:33
업데이트 2026. 06. 09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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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 투 더 스테이지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

여든 넘어 까막눈 졸업한 칠곡 할머니들 실화 뮤지컬화
투박한 사투리 생활 언어 그대로 살린 흥겨운 넘버들
인물마다 품은 굴곡진 사연 활력 있는 연기에 빨려들어가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의 한 장면. 사진=라이브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의 한 장면. 사진=라이브


100세 시대라지만 미디어 속 노년은 돌봄의 대상이자 무기력함의 표본이다. 병원 대기실에 우두커니 앉아 순서를 기다리는 굽은 뒷모습, 색 바랜 정자 아래서 두는 끝없는 장기 대국. 이 낡은 편견의 정수리에 당수를 내리꽂는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무대에 올랐다.

뮤지컬 ‘오지게 재밌는 가시나들’은 유쾌하고 통쾌하다. 눈물샘을 쥐어짜며 효도를 강요하다시피 하는 신파극을 예상했다면 오산이다. 오히려 반대다. 이 할머니들은 “니들이나 잘하세요”라며 신명 나는 트로트의 볼륨을 높인다.

여든이 넘은 나이에 처음 연필을 쥐고 글을 익힌 칠곡 할머니들의 실제 사연은 무언가를 새로 배우고 쟁취하는 과정이 얼마나 인간의 심장을 뛰게 하는지 증명한다. 제목에 등장하는 경상도 사투리 ‘가시나’의 재해석도 멋지다. 할머니들은 이를 ‘가장 시작하기 좋은 나이’로 명랑하게 푼다. 배움에는 때가 없다는 체험적 선언이다. 까막눈이라는 부끄러움을 딛고 일어나 한 글자씩 살아온 세상을 써 내려가는 늦깎이 학생들의 도전이 관객의 마음을 두드린다.

교실에 모인 학생 4명의 면면은 각기 다른 색깔로 반짝인다. 반장 영란 할머니는 손주가 동화책을 가져올까 봐 부엌으로 숨어들었던 과거를 끊어 냈다. 이중 받침이 달린 ‘닭’이라는 글자도 거침없이 읽으며 ‘글 읽는 할머니’로 당당하게 탈바꿈했다.

지원서를 쓸 줄 몰라 동네 노래자랑 지원서를 번번이 구겨 버려야 했던 춘심 할머니는 마침내 예비가수의 꿈을 향해 나아간다. 그가 쓴 시 ‘어렸을 때 가수해쓰마 조아쓸글’이라는 문장이 뭉클한 웃음을 준다.

첫사랑 오빠(지금은 ‘웬수’ 남편이 된)가 읊어 준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시를 평생 품고 살아온 인순 할머니는 여전히 낭만 가득한 열일곱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해 분하다는 뜻으로 지어진 이름 탓에 평생 속앓이를 했던 막내 분한 할머니의 눈물겨운 사연도 있다. 문해학교 친구들이 다정하게 불러 주는 자신의 촌스러운 이름을, 시를 읽고 쓸 수 있게 된 분한 할머니는 비로소 기쁘게 받아들인다.

배우들의 연기는 새벽 어시장의 활어처럼 펄떡인다. 빠르고 억양이 센 경상도 사투리가 총알처럼 날아다닌다. 걸음은 느리고 안 쑤신 데가 없는 몸이지만 소녀의 명랑함이 객석까지 날아온다.

캐스팅도 꽤 화제를 모았는데 차청화, 김나희, 김미려 같은 대중매체에서 친숙한 배우들도 참여했다. 차청화와 김나희는 왕년의 가수 지망생 ‘춘심’, 김미려는 푸시킨의 시를 읊는 ‘인순’ 역이다. 내가 본 날의 춘심은 김나희였는데, 기대했던 것보다 노래를 훨씬 더 잘해 감탄했다. 사실 김나희는 최근 뮤지컬 분야에 힘을 주고 있는 듯하다. 지난해 연말부터 올 초까지는 뮤지컬 ‘슈가’에서 ‘스위트 수’ 역을 맡기도 했다.

‘영란’ 역의 구옥분은 최근작 ‘푸른사자 와니니’에 이어 또다시 할머니 역으로 분했는데, 드세고 목소리 큰 할머니라는 공통점이 있다. 할머니 2연타석이지만 그 전작은 뮤지컬 ‘헤비메탈걸스’였다. 어느 작품이든 뚜렷한 존재감을 보여 온 김아영도 ‘영란’ 역을 맡고 있는데, 두 사람의 색채가 많이 다르다.

할머니들의 반짝이는 일상은 다큐멘터리 PD 석구의 카메라에 오롯이 담긴다. 여기에 문해학교 교사 가을의 열정적인 수업은 이들에게 든든한 날개를 달아 준다.

지원금 삭감으로 교실 문을 닫게 될 위기에도 늦깎이 학생들은 연필을 놓지 않는다. 시 쓰기로 못다 이룬 꿈을 되찾는 여정이 유쾌하게 펼쳐진다. 겉보기와 달리 극 자체는 순한 맛이다. 억지로 짜내는 긴장, 자극적인 갈등구도 없이 인물들의 굴곡진 사연만으로 흡입력을 뿜어낸다.

칠곡 할머니들의 실제 이야기를 무대화한 이 뮤지컬은 외형적으로도 의미 있는 성과를 냈다. 지난해 국립극장 하늘극장에서 첫선을 보였는데 예매처 평점 10점 만점에 9.9점을 기록하며 호평을 끌어냈다. 올해 1월 제10회 한국뮤지컬어워즈에서는 400석 미만 작품상과 연출상, 극본상 등 3관왕을 거머쥐었다. 일본 도쿄 휴릭홀에서 열린 ‘K뮤지컬 로드쇼’에서는 20분간의 하이라이트 시연만으로 현지 관객의 기립박수를 이끌었다. 올해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산실 지원사업에 선정되기도 했다.

강병원 프로듀서와 오경택 연출, 김하진 작가, 김혜성 작곡가, 신선호 안무가 등은 칠곡 할머니들이 삐뚤빼뚤하게 써 내려간 시 20여 편을 세련되게 다듬지 않았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와 생활밀착형 언어를 뮤지컬 넘버로 고스란히 살려 냈다. 5인조 라이브 밴드 연주를 12곡의 넘버에 풍성하게 입혔다. ‘우리는 가시나’ ‘첫사랑’ ‘노래자랑’ ‘엄마 시’ ‘호랭이가 물어갈 년’ 같은 넘버들이 흥겹기만 하다.

이 작품은 ‘무언가를 시작하기엔 이미 늦었다’며 지레 겁먹는 청춘들에게도 묵직한 응원의 펀치를 날린다. 늙어 가는 과정이 두려운 이들에게는 다 타 버린 줄 알았던 장작에 다시 불을 붙이는 노년의 열정을 보여 준다. 나이 먹는 일이 이토록 재밌고 신나는 모험일 수 있다니. 객석에 앉아 여든의 늦깎이 학생들과 웃고 울다 보면 어느새 인생의 새로운 봄날을 기분 좋게 꿈꾸게 된다. 주름진 손으로 꾹꾹 눌러쓴 할머니들의 삐뚤빼뚤한 글씨들이 그 어떤 명필의 것보다 더 깊숙이 가슴에 박힌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필자 양형모는 15년 이상 연극·뮤지컬·클래식·국악 등을 담당해온 공연전문기자다. ‘일주일에 1편은 공연을 보자’는 ‘일일공’의 주창자. 스포츠동아 국장으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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