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군사 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위대한 총사령관을 기리며…단결하여 잘 싸우자…노래로 칼로

입력 2025. 11. 11   16:04
업데이트 2025. 11. 11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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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과 함께하는 전쟁사
러시아 원정 패배와 대프랑스동맹의 복원, 그리고 라데츠키 행진곡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 실패 소식에
대프랑스동맹 탈퇴 국가 다시 합류
오스트리아 라데츠키 장군 활약에
2분30초짜리 행진곡이자 군가 헌정
이탈리아 제외 모든 나라에서 환영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라데츠키 장군.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라데츠키 장군.


이베리아반도 전쟁이 장기화하면서 프랑스군은 이미 3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발생했다. 여기에 러시아 원정이 실패하면서 30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추가 발생하면서 군대를 다시 양성해야 할 상황에 처했다. 특히 장교와 부사관의 손실이 컸다. 1812년 12월 러시아에서 돌아온 나폴레옹에게 군대 양성은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베리아반도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는데, 영국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에 프랑스군이 손실을 많이 입으며 국경지대까지 몰렸다. 러시아 원정 실패 소식이 전해지자 그동안 대(對)프랑스동맹에서 탈퇴했던 국가들이 다시 동맹을 모색했고,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해 동맹 관계에 있던 속국들의 총구가 나폴레옹 군대로 향하기 시작했다. 

 


대프랑스동맹 연합군, 나폴레옹 군대와 최후의 일전 준비

특히 프로이센은 강한 전투의지를 표출했다. 동프로이센과 슐레지엔, 브란덴부르크에서 전쟁을 외치기 시작했고 주저하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1770~1840)도 1813년 2월 러시아 차르와 동맹을 맺고 한 달 뒤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다. 프로이센은 프랑스로부터 점령당한 영토를 회복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영국과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이 다시 동맹을 맺고 프랑스와 일전을 준비하자 나폴레옹도 잃은 병력을 새롭게 보충해 군대 양성에 나섰다. 우선 징집 폭을 늘려야 했기에 청년층부터 장년층까지 확대했다. 하지만 귀족과 농민 등 곳곳에서 징집에 반대했고, 많은 병력이 탈영하기까지 했다. 아울러 기병 운용을 위해선 말을 많이 확보해 훈련시켜야 했는데, 러시아 원정에서 군마 손실이 워낙 커 많은 기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다. 전반적으로 훈련은 미숙했고, 기병과 포병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1813년 1월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하던 러시아군은 여세를 몰아 폴란드를 침공했다. 10만 명이 넘는 병력 앞에 폴란드를 담당하고 있던 프랑스군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3월에는 러시아군이 프로이센까지 진출해 동맹을 다시 확인하고 프랑스 진출을 계획했다. 이제 동맹군의 본격적인 프랑스 공격 준비가 이뤄졌다. 4월 나폴레옹은 가용한 병력 20만 명을 끌어모아 마인츠에 집결시킨 뒤 현재 독일의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에서 프로이센과 러시아 연합군을 격멸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카를 지라르데·폴 지라르데의 ‘바이센펠스 전투의 1813년 징집병들’. 필자 제공
카를 지라르데·폴 지라르데의 ‘바이센펠스 전투의 1813년 징집병들’. 필자 제공



휴전협상도 결렬…나폴레옹 막다른 골목에 서다

1813년 5월 1일 나폴레옹은 라이프치히 남서쪽의 작은 도시 바이센펠스에서 전투를 벌였다. 다음 날은 바이센펠스에서 라이프치히 이동로 방향에 있는 뤼첸에서 전투를 했다. 나폴레옹 군대는 승리했지만 많은 병력 손실을 감수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병력의 훈련 수준이 낮은 점과 러시아 원정에서 입은 기병의 큰 손실로 인해 기동력이 떨어져 상대를 포위하고도 섬멸하지 못하는 상황을 절감해야 했다. 게다가 프로이센 군대의 전투력이 막강하다는 것을 체감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자 나폴레옹 측과 동맹군 측은 일정 기간(약 2개월)의 휴전과 드레스덴 회담, 프라하 회담 등의 협상으로 전쟁을 방지하고 점령했던 영토를 일부 조정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합의하게 되면 오스트리아군이 끝까지 참전하지 않는다는 등의 내용도 포함됐다. 하지만 협상은 결렬됐고 8월 11일 오스트리아군도 동맹에 참여하면서 프랑스에 선전포고했다. 이제 동맹군에는 프랑스 주변의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스웨덴 등이 모두 참여했고 병력 규모는 80만 명을 넘어섰다.

대프랑스동맹 연합군은 전면 재대결을 위해 병력을 1·2·3군으로 편성해 지휘관을 임명하고 작전 중 상호 협조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참전계획을 세웠다. 이른바 ‘트라헨베르크 계획(Trachenberg Plan)’이다. 그러나 나폴레옹 군대는 동맹군보다 병력 수급에 어려움이 많았다. 모든 병력을 다 모아도 약 65만 명 수준으로 열세였다. 그마저 나폴레옹은 병력을 3군데로 분산시켰다. 아마도 적을 분산시켜 각개격파하려는 의도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나는 베를린에서 대결토록 하고, 다른 하나는 함부르크에서 방어토록 했다. 나폴레옹은 직접 드레스덴(체코와의 국경지역 인근)에서 전투를 준비했다.


연합군에 참전했던 오스트리아의 라데츠키 

여기서 우리의 귀에 매우 익숙하고, 매년 신년음악회에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라데츠키 행진곡’을 소개하고자 한다. 요제프 라데츠키(1766~1858)는 대프랑스동맹 연합군의 일원으로 ‘트라헨베르크 계획’ 작성에 참여했던 오스트리아 군인이다. 그는 드레스덴 전투와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주력군인 1군의 참모장으로 활약했으며 1814년 파리에 입성한 오스트리아 장군으로 많은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요한 슈트라우스 1세(1804~1849)는 당시 황실인 합스부르크가와 좋은 관계에 있었는데, 1848년 3월 ‘빈 체제(Vienna System)’에 항거하는 혁명이 발생했을 때 정부군의 사기 앙양을 위해 이 곡을 쓰기 시작했다. 특별히 곡 제목에 ‘라데츠키’를 사용한 이유는 라데츠키 장군이 나폴레옹 전쟁 당시인 1813년 프랑스군을 공격해 나폴레옹을 패퇴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1848년 초에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이탈리아 북부 밀라노 등지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출정해 대승을 거둔 것을 기념하는 차원도 있다.

밀라노 등지에서 봉기가 일어나자 인접해 있던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프랑스와 이탈리아 접경지역)은 밀라노를 자신들의 영토로 병합하려 했다. 이때 라데츠키 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국군은 1848년 3월부터 1849년 8월까지 쿠스토차 전투와 노바라 전투에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카를로 알베르토(1798~1849) 국왕의 군대를 무찔러 대승을 거뒀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 백전노장의 승전을 ‘라데츠키 행진곡’에 담아

1848년 8월 31일 빈에서는 이 승리를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곳에서 ‘라데츠키 행진곡’이 초연됐다. 당시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피아노판 표지에는 ‘위대한 총사령관을 기리기 위해 황제 겸 국왕 군대에 헌정됐다’고 쓰여 있었다고 한다. 군가이자 행진곡인 관계로 비교적 짧으며, 2분30초가량 연주된다. 매우 힘차고 흥겨우며 클래식 연주임에도 관객의 박수를 허락하고 유도하는 특징이 있다. 북소리와 현악기, 관악기가 잘 어우러져 웅장하면서도 경쾌한 리듬을 만들어 낸다.

우리가 흔히 듣는 것은 연주곡이지만 군가로 불리는 경우도 많다. 가사에는 ‘오스트리아 조국을 위해 단결해 싸우자. 라데츠키 장군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으니 잘 싸우자’ 등의 애국심에 호소하는 내용이 주로 담겨 있다. 라데츠키 장군이 이탈리아 통일전쟁을 진압하기 위해 참전했을 때 그의 나이는 83세였다. 역전의 노장이 사령관으로 나서 약 2년에 걸쳐 이탈리아의 통일의지를 완전히 제거한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이탈리아에서는 ‘라데츠키 행진곡’ 연주를 반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탈리아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서 이 곡은 많은 환영을 받으며 연주되고 있다.

 

필자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필자 서천규(군사학 박사) 전 국방부 군비통제검증단장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2작전사령부 작전처장, 육군대학장, 건양대 군사학과 교수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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