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의 산보, 그때 그 곳
테헤란로, 한·이란 우호의 상징
1977년 테헤란시장 서울 방문해 ‘결연’
두 도시에 서로의 이름 딴 도로 만들어
혁명으로 왕조 무너지자 양국 관계 서먹
2000년대 K드라마 열풍 불며 교류 재개
도로 원래 이름은 선정릉 있어 ‘삼릉로’
벤처 열풍 80년대는 ‘테헤란밸리’ 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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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헤란로는 서울 강남구 강남역에서 동쪽으로 삼성교까지 4.1㎞ 구간을 일컫는 도로명이다. 왕복 10차로에 너비 50m여서 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도로 아래로 지하철 2호선이 지나간다. 강남역에서 시작해 역삼역·선릉역·삼성역까지 이어진다.
1970년대 이래 많은 기업이 이 대로 주변에 몰려들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세계적 트렌드를 좇아 벤처 기업이 몰려들면서 반도체 클러스터인 미국의 실리콘밸리를 본떠 ‘테헤란밸리’라고 불렀다. 1995년에 이르러서는 두루넷, 네띠앙, 안철수연구소 등 소프트웨어와 정보통신 벤처기업들이 성황을 이뤘다. 한국 IT산업의 중심지가 된 것이다. 지금은 닷컴 버블이 붕괴하면서 비싼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IT 기업도 빠져나가 더는 테헤란밸리로 불리지 않는다. 2010년부터는 테헤란 대로로 부른다.
테헤란 대로에는 IT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감각도 갖추고 있다. 역삼동 사거리의 GS아트센터는 각종 공연을 활발히 열고 있고, 포스코센터는 세계적 화가 프랭크 스텔라의 고철 조형물 ‘아마벨’과 백남준의 작품 ‘TV 나무’ ‘TV 깔때기’ 등을 선보이기도 했다. 이곳의 야경은 국내외 관광객 발길도 붙잡는다. 올 상반기까지만 해도 밤의 테헤란로에서는 외국인, 특히 이란 비즈니스맨이나 관광객들이 야경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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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테헤란로의 이름은 ‘삼릉로’였다. 성종 내외와 그 아들 중종의 능 등 세 개의 왕릉이 있어 그렇게 불렀다. 선정릉(宣靖陵), 즉 선릉과 정릉이다. 이 선정릉은 1592년 임진왜란 때 한양에 쳐들어온 왜적에게 도굴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익이 『성호사설』에 비분강개를 쏟아낸 바 있다. “임진(壬辰)에 당한 양릉(兩陵)의 변고를 생각하면 잊을 수 없는 원수이다.” 왜적들은 금은보화를 노려 능을 파헤쳤다. 선조는 치욕을 당한 그 이듬해 7월 21일까지 선릉을 개장(改葬)하도록 명했다(『선조실록』 26년 7월 4일).
그러나 개장은 광해군을 넘어 인조대에 와서야 실행됐다. 그때도 쉽지 않았다. 능 훼손을 치욕으로 여긴 유림의 반발 때문이었다. “왜적들이 선정릉에 묻힌 왕들의 유해를 꺼내고 대신 가시(假屍)를 묻었다”는 소문이 퍼진 까닭이었다.
유림이 곡장 내 거목 30여 그루와 청룡 백호의 대소 나무 4000여 그루를 모두 베어버린 대형 사건이 발생했으나 왕이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다(『인조실록』 5년 11월 17일). 인조가 그런 태도를 한 데는 왜국이 도굴 진범이라며 죄인을 압송해 보내온 사실이 있어서였다.
이익은 “진범이라는 죄인이 나이가 젊어 임진년에 도굴을 범했을 리가 없다는 판단 때문에 왜의 처사에 더욱 치욕을 느낀다”고 썼다. 이익은 시신 바꿔치기는 왜에 실익이 없다는 이유에서 사실로 믿지 않았다(『성호사설』). 개장은 인조 8년이 돼서야 성사됐다. 그해 10월 구체적인 절차와 복식 등이 의론됐다(『인조실록』 8년 10월 2일).
구보는 380년 후 선정릉이 이번에는 자신에서 유래한 ‘삼릉로’라는 이름을 뺏긴 데서 수난이 되풀이됐다고 여긴다. 테헤란로는 그런 공간적 배경 속에서 태어났다.
1962년 수교 이래 우리나라는 이란과 우호 관계를 유지해 왔다. 특히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때 산유국 중 유일하게 이란이 우리나라에 석유를 공급했다. 1977년 6월 이란의 수도 테헤란시 시장이 서울을 찾았다. 자매결연을 위해서였다. 국왕 팔레비 2세의 측근이던 닉페이 시장이 구자춘 서울시장에게 우의 증진을 위해 두 도시에 서로의 이름이 들어간 도로를 만들자고 제안하자 구 시장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해서 서울에 ‘테헤란로’가, 테헤란에는 ‘서울로’가 만들어졌다.
구보는 1970년대 테헤란로를 기억한다. 지금의 강남역 사거리서부터 말죽거리, 양재동 사거리 일대가 온통 황무지였다. 부동산 이재에 밝은 이들이 땅 수집을 하던 곳이었다. 구 시장은 이곳에 지하철 2호선을 까는 성의를 보였다. 박정희 정부는 원유 대국 이란과 계속 밀월 관계를 유지했다.
하늘이 시기했을까.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나라는 모두 큰 변을 당한다. 1979년 1월 팔레비 왕조가 무능과 부패로 무너지고, 박 대통령은 그해 10월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에게 피살당했다. 그에 따라 테헤란로의 두 주역도 동반 쇠락한다. 닉페이 시장이 혁명재판소에서 총살형에 처해졌고, 내무부 장관에 올랐던 구 시장도 12·12 내란으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에 정치규제를 당했다.
이란혁명 후 양국 관계는 서먹해졌다. 이란은 북한과 급속히 친해졌다. 1980년대 강남구 주민들은 ‘테헤란로의 도로명을 바꿔달라’는 민원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자매 관계는 계속 유지됐고, 2000년대 들어서는 한국 드라마와 K팝 등 한류 열풍이 일면서 2002년 ‘서울로’에 ‘서울공원’과 ‘한국광장’이 조성됐다.
교역 규모도 2011년에는 174억 달러에 달했다. 2016년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이란을 국빈 방문해 제2의 중동 붐을 통한 관계 발전을 모색했다. 미국의 이란 제재로 달러 결제가 금지되자 ‘원화 결제’라는 우회 방식을 만들어 교역을 이어 나간 역사도 있다.
구보는 당시 언론이 보도한 청와대의 정책 브리핑을 인상 깊게 본 기억을 떠올린다.
“경제 규모 크기만큼 이란과의 경제 협력이 국내 경제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며 제2의 중동 붐을 일으킬 수 있을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이란 문화 이해도와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교류 역사에 대한 이해가 선행돼야 하지 않을까. 추억을 기억하며 되살아나게 해주는 옛 친구는 언제나 반가운 법이다.” - 2016년 5월 2일
2025년 6월 이스라엘의 공습과 미국의 폭격으로 ‘공포에 빠진 테헤란 시민들이 도시를 빠져나가고 있다’고 외신들이 전했다. 그곳 ‘서울로’도 쇠락해진 모습일 것이라고 짐작하며 구보는 새삼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함을 확인한다. ‘옛 친구’인 한국과 이란이 현재 각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면에는 자유민주주의의 일탈이라는 공통점이 있는 까닭이다. 테헤란로가 다시 스타트업 육성지로 우뚝 서길 기대하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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